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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연상황
앞 설화가 끝나고, 조사자가 탁자 위에 놓인 설화 목록을 보고 이 설화를 청하여 들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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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지역: 경상남도/울산시 분류코드: [울산시 설화 62] 테이프번호: T. 울산 5 뒤 조사장소: 북정동 조사일: 1984. 8. 10. 조사자: 정상박, 김현수 제보자: 김석보(남, 57세) 원효대사와 천성산(千聖山) * 앞 설화가 끝나고, 조사자가 탁자 위에 놓인 설화 목록을 보고 이 설화를 청하여 들은 것이다.* 천성산 북쪽에는 지금 입구에 들어서면, 암반에 ‘운흥동천‘이라고 하는 큰 글자를, 운흥동천, 구름 운짜(雲字), 일 흥(興)짜, 동네 동짜(洞字), 하늘 천짜(天字), 운흥동천(雲興洞天)이라는 네 글자가 아주 대서(大書)로, 글자 굵기가 우리 팔뚝보다 더 굵은 정도로 크게 음각(陰刻)으로 해가지고 넉 자가 새겨져가 있읍니다. 그 옆에 보면, ‘부사 홍상빈(府使 洪尙賓)이라.’ 울산부사가 썼으니까, 홍상빈, 성은 홍씨(洪氏)고 상은 경상도 하는 상짜(尙字)하고, 빈은 내빈이라는 손 빈짜(賓字), 홍상빈, 홍상빈이라 하는 사람이 썼었는데, 조각이 되어 있읍니다. 그리고 그 골짜기에 올라가면은 운흥사(雲興寺)라는 절이, 큰 절이 있었던 절터가 지금 있읍니다. 거기에 부도(浮屠)도 있고 축대도 있고 기와조각도 있고 토기도 있고, 또 절에서 종이를 만들어 낸 딱바위(1)-종이의 원료인 닥나무 껍질을 찧던 바위- 도 있고 그다음에 물을 담았던 석조(石槽) 그러니까 물탱크, 석조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읍니다. 흔적이 있읍니다. 그것이 역대의 병난과 전설적인 얘기에 의해서 폐찰이 되었읍니다마는, 이 절이 어떻게 생겨났느냐 하면 원효대사께서 동래 기장(東萊 機張)(2)-행정구역상으로는 慶尙南道 梁山郡 機張面- 에 있는 장안사(長安寺), 장안사 절이 있고 장안사에 소속된 암자가 척판암(擲板庵)이라는 암자가 있읍니다. 척판암은 던질 척짜(擲字) 손 수변에 정씨라는 정짜를 씁니다. 정씨, 던질 척짜 되겠어요. 척결한다 할 때 던질 척짜, 척판암. 판은 판자 판짜(板字), 암자 암짜(庵字), 척판암인데, 판자를 던진 암자다, 이런 얘깁니다. 판자를 뭐 때문에 어디로 던졌느냐? 그 암자에서 원효대사께서 수도를 하고 있을 때 그 옛날에 큰 스님들은 점성술(占星術)도 하고 있었는가봐요. 하늘 별 보며 점치는 점성술을 했는데, 원효대사께서 하늘의 별을 보고 점을 쳐 봤더니 중국 오대산(五臺山)에, 오대산 밑에 큰 절이 있고, 그 그 법당에 큰 법 당 안에는 중 천 명이 들어 앉아서 법회를 보고 있었어. 불교 대법회를 보고 있었는데, 그 뒤 산이 곧 순식간에 무너져서 그 법당을 덮치게 되어 있어요. 매몰되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천 명이 한 사람도 살아 남지 못하고 고스란히 죽게 돼 있어요. 그래서 ‘이 위급한 사태를 어떻게 구출하느냐?’ 원효대사께서 걱정을 하다가 급해서 안 되겠다, 정지(부엌), 암자에 있는 정지 문짝을, 판자를 떼가지고, ‘해동사미원효천승구제(海東沙彌元曉千僧救濟)’ 지금 그 척판암에 가면 벽에 이 판자 던지는 그림이 있고 거게 그런 글귀가 써져 있읍니다. 해동사미라는 것은 해동은 그 때 신라 우리나라를 해동이라 그랬죠, 사미라는 거는 스님을 스스로 낮추는 것이 모래 사짜(沙字)하고 문 문짜, 아니 [앞 말을 정정하여] 사미, 너 미자(彌字), 사미, 해동사미, 문 문짜 사문(沙門)이라고도 하고 사미라고도 하죠, 해동사미원효는 천승구제, 천 명의 중을 천승구제라, 구제한다. 이렇게 써가지고 이 판자를 중국 상공으로 보고 던졌읍니다. 판자는 순식간에 그 당나라 오대산 밑에 그 법회하는 법당 상공을 날아가서 공중에서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돌았다 하는 그런 전설입니다. 법회하던 중 한 사람이 이상한 소리가 나서 그 소리에 끌려서 밖으로 나왔읍니다. 문간 가까이에 앉았던 중이, 나와서 소리나는 쪽을 하늘을 쳐다보니까 하늘에서 어떤 판자가 하나 혼자서 놀면서 이상한 소리를 냈다 말입니다. 그래서 신기해서 법당 안에 있는 스님들을 불렀읍니다. 소리치면서, “스님들 여기 나와서 저것 좀 보시오. 이상한 일이 생겼읍니다. 소리가 납니다.” 하고 부르니까 스님들이 그 소리에 그냥 깜짝 놀라가지고 법회를 걷어치우고 우르르 하고 천 명의 중이 다 나왔읍니다. 마지막 중이 법당 문턱을 넘어서자 뒷산이 짝 무너져가 천둥치는 소리가 나면서 법당은 그냥 무너진 산 속으로 깔려서 매몰이 되고 말았읍니다. 한 사람도 다침이 없이 천명은 고스란히 살아났읍니다. 그러자 공중에 놀던 판자가 땅에 떨어졌는데, 떨어진 판자를 보니까 ‘해동사미원효천승구제‘라 하는 글귀가 있었읍니다. 중들은 그 때 깨우친 바가 있었읍니다. “우리가 여기서 아무리 큰 소리를 쳐도 진짜 위대한 스님은 신라국 해동, 해동에, 해동 신라국에 있다. 이 원효대사께서는 우리 천 명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다. 찾아가서 우리가 제자가 되자. 그 분에게 계를 받고 우리가 교훈을 받자.” 그래서 배를 타고 황해를 건너서 신라로 돌아와서 원효대사를 찾으니, 원효대사께서는 지금 장안사 척판암에 계시다 천 명의 중이 그냥 불시에 척판암에 닥치니 원효대사께서는 당황을 했읍니다. 조그마한 암자에 천명의 중이 들이 닥쳤으니 이를 감당을 못 해가지고 당분간 장안사에 그 주위에 머물게 하면서 밥을 해가 멕이고 있으면서 이 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절터를 찾아 헤맸읍니다. 헤매다 보니까 지금 그 운흥사 있던 자리에 거기에 절 하나 앉아서 천 명이 있을 만한 자리다. 터를 잡고 절을 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큰 가람을 지었죠. 지어가지고 거기다 수용하고, 그 꼭대기에 벌판이 하나 있는데, 그 벌판에 중들을 데리고 가서 수련을 시키고 거기에 경(經)을 가지고 교화를 시키는데, 경은 무슨 경을 가지고 교화를 시키느냐 하면 화엄경(華嚴經)을 가지고, 원효대사의 특기가 화엄경입니다. 그 분이 가지고 도를 통하고 ‘화엄경소(華嚴經疏)’를 지은 분인데, 화엄경을 가지고 천 명의 중을 그냥 설교를 하니, 이 천 명들이 모두가 성인이 다 됐다, 원효대사의 그 설교, 화엄경의 설교를 듣고 성인이 됐다 하는 그런 얘깁니다. 그래서 산 이름을 천성산(千聖山)이라 그러고 그 들판을, 벌판을 산꼭대기 벌판을 화엄벌이라 그럽니다. 지금 화엄경의 이름을 따서 화엄벌이라 전해지는데, 여기에 인자 전설이 있읍니다. 어떤 전설이 있느냐 하면 천 명의 중이, 중을 절을 지와 놓고 중이 설교를 하는데, 이거 먹어야 되니까 중들이 자기 먹을 것은, 옛날부터 그 법도가, 바랑 짊어지고 목탁치고 염불하고 백팔염주 목에 걸고 속가에 나가서 집집마다 염불하면서 탁발하는 것, 공양하는 것이 중들의 임무인데, 자기 먹을 것 자기가 구해 와야 되는데, 천 명이 내리깔리다(3) 많은 중들이 돌아다니었다는 말이다. 보니까, 그 근처에 동네가 별로 없는 동네에 몇 고을이 그냥 온통 중 판이고, 와글와글하고 민폐가 이만저만이 아니고, 원효대사가 미안하고 미안하기 짝이 없어요. ‘민망스러워서 안 되겠다.’ 싶어서 원효대사가 한가지 생각을 해 냈읍니다. 하루는 천 명 중 보고, “오늘부터는 탁발 한 사람도 나가지 말아라. 공양 가지 말아라.” 중들이 이거 무슨 소린가 싶어서 ‘이젠 굶어 죽게 생겼다.’ 생각을 했읍니다. 그러더니 그 중에 한 스님을 부르더랍니다. “너 오늘 가서 내 시키는 대로 하라.” “어떻게 할까요?” “이 고을에 내려가면 큰 부자집이 한 집 있다. 그 집에 가서 이 바랑도 목탁도 가져가지 말고, 자루만 들고 가가지고 염주만 걸고 자루만 들고가서 그 집에 가가지고 목탁을 들고 가가지고 염주들고 목탁을 들고 바라는 버리고 자루만 빈 자루만 들고 가서 거어 가서 이 자루에 쌀이 공양미가 한 자루 될 때까지, 그 집에서 한 자루를 줄 것이다. 한 자루를 받아가지고 오너라. 만약에 자루가 차지 않거들랑 한 자루가 안 되거든 오지 마라. 한 자루 될 때까지 공양을 해 오너라.” 그래서 스님 시키는 대로 인자 자루를 들고 그 집에 내려 갔읍니다. 부자집에 가서 목탁을 치고 염불을 하니까, 부자집이니까, 쌀을 한 말을 푹 퍼가 와가지고 중이 들고 있는 자루에다 부우니까 한 자루가 되었어요. 중이 인자 자루를 [손으로 시늉을 하면서] 자루목을 이렇게 쫄라가 묶어가지고 들고 올라고 하고 주인은 부어 주고 인자 중은 가겠지 하고 돌아서서 가는데, 주인이 돌아서자 그 쌀은 빈 자루가 되어 버렸어. 자루에 쌀이 하나도 없다 말입니다. 중이 이상해가지고 ‘이거 큰 일났다. 한 자루가 되거든 오라고 그랬는데’ 싶어 또 목탁을 치고 염불어 했읍니다. 주인이 이상해서 ‘한 자루를 분명히 줬는데, 인자 자루에 넣어 갈 데도 없고 바랑도 없는데, 지가(제가) 주면 어떻게 가져 갈라고 그러느냐? 무거워서도 못 가져 갈 텐데, 돌아보니 빈 자루예요. 방금 준 그 한 자루는 간 곳도 없고 아무 것도 없고 단 손에 단 손에 그냥 자루만 들고 서 있는데, 구신이 탄복을 할 노릇이다.’ 그래서 이상하다 싶어서 또 쌀 한 말을 퍼 와서 또 부어 주었읍니다. 그리고 돌아섰는데, 또 한가지. 세 번을 부워 주었는데 마찬가지예요. 그 때사 그 집 주인이, 부자 주인이 깨우친 바가 있었읍니다. ‘하아 이 참 도술 잘 하는 원효대사라는 분이 이 산에 와 있다더니 원효대사의 도술이구나! 이거 내가 이걸 깨우치지 못하고 있다면 내 우리 곳간에 있는 곡식이 원효대사의 도술이라면 절 모르고 시주한다고 밤중에 언제 날아 올라갈지 모르고 절 곡창으로 다 날아 올라가 버리겠다. 그리 되면 시주한 공도 없이 나는 쌀만 뺏기고 나는 거지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차라리 갖다 바치고 공이나 닦자.’ 싶은 그런 생각으로 이 부자가 깨우친 거예요. 그래서, “스님, 알겠읍니다. 그냥 올라가십시요.” “안 됩니다. 우리 스님께서 한 자루 안 되면, 오지 마라 그랬읍니다.” “알겠읍니다. 내일 내가 공양미 백 석 싣고 올라갈테니 한 자루가 문제가 아닙니다. 가서 그렇게 얘기하십시요. 꼭 그러면 한 자루 부아 드리리다.” 하고 한 말 부어주니까 그 때는 안 없어지고 그냥 있어요. 그걸 들고 그냥 올라갔어요. 가서 그 중이 보고하는 거예요. “스님, 오늘 이상한 변을 당했읍니다.” “무슨 변을 당했노?” 그래 그 쌀이 없어진 얘기, 세 번 없어지고 네 번째 받아 왔다, 그 얘기는 했거든요. 그러면서, “그 무슨 일인지 도저히 알 수 없어요. 나도 못 믿겠읍니다. 그래 그 주인이 그걸 보고 원효대사님의 도술인 줄 알고 내일 공양미 백 석 실고 올라오기로 약속을 했읍니다.” 그러니까 원효대사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러면 그렇지. 알았다.” 그 이튿날 있으니까 정말 그 부자가 공양미 백 석을 말에다 실고 말이 그냥 쌀 실은 공양미 실은 말이 줄을 섰어요. 쫙 인부들, 머슴들 짊어지고 그냥 바리바리 실고 절로 올라왔읍니다. 차개차개(차곡차곡) 받아서 곡창에 부었읍니다. 이 소문이 났읍니다. 이웃에 있는 다른 부자들도 가만히 그 소식을 듣고 있으니 ‘내가 미련시럽게 있다가는 나도 당할 것이다. 내가 당하기 전에 미리 갖다 줘야겠다.’ 그래가 자기 재산대로 그 사람이 백 석 갖다 줬으니 나는 오십 석 갖다 줘야 되겠다. 나는 삼십 석 갖다 줘야 되겠다. 그리고 너도 나도 할 거 없이 자꾸 인자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절에서 공양하러 한 사람도 안 나와도 그 절 곡창은, 항상 쌀창고는 가득 차가지고 천 명의 중들이 먹는 양식을 전연 고통을 안 당했다 하는 얘깁니다. 그런데 그 문제는 그렇게 해서 해결이 났는데, 그 뒤에 중들이 그 산에 다니는데, 칡넝쿨이 있어 가지고 중들이 자꾸만 넘어져가 걸려서 넘어지는 거예요. 한 번은 중이 다리를 다 다치고 삐고 막 갈아부치고 막 피가 나는 거예요. 그래서 칡넝쿨 때문에 이 중들이 원효대사에게 하소연하는 거예요. “하, 이 산에 너무 칡넝쿨이 많아서 도대체 다니기가 불편하다고, 자꾸 넘어진다고.” “그래” 하루는 산신령에게 원효대사가 만나 가지고 얘기했대요. “산신령님, 내 제자들을 자꾸 칡넝쿨에 걸려 넘어지게 해서 되겠소. 우리 제자들이 다니는 길에는 칡넝쿨이 이렇게 건너지 말게끔 칡보고 명령 좀 하시오.” 그랬더니, 산신령께서, “알겠소.” 답을 하고 그 뒤로부터는 이 산에는 칡넝쿨이 스님들 다니는 길이 있는데 그 길을 중심으로 해가지고 저 쪽, 길 저 쪽 칡넝쿨이 이 길을 건너지 않고, 이 쪽에 또 칡넝쿨은 저 쪽으로 건너지 않고 길에 와서 딱 칡넝쿨 머리들이 머물고 여기서는 까딱 들고 더 이상 자라지를 않았다, 그런 전설이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고. 그 다음에는 또 어떤 전설이 있느냐 하면 그 원효대사가 천 명의 스님들에게 자기의 도술을 한번 과시하기 위해서, “너희들 저어 내려가서 동네가서 마을에 가서 농사지은 짚 한 단씩만 구해 오너라.” 천 명이 내려가서 짚을 천 단을 가져 왔어요, 천 단을 가져 온 짚을 전부 추려가지고 모두 새끼로 꼬아가 똘똘 뭉쳐가지고 북을 만들었는 기라. 짚을 가지고 짚북을 만들었는데, 그래서 원효대사가 큰 그냥 북채를 만들어 가지고 꽝하고 치니까 그 산이 ‘저르릉 저르릉’하고 짚북소리가 웅산(熊山), 웅촌(熊村), 언양(彦陽), 삼남(三南) 서너 너덧 고을에까지 짚북소리가 울렸다, 그런 소리, 그런 전설이 전해집니다. 그래서 그 오늘은, 그런데 그 운흥사절이 나중에 오랜 세월 뒤에 어떤 스님이 그 절을 큰 유명한 절을 지니고 있는데, 절간에도 옛날에 중들이 떠돌이 중들은 큰 절로 그냥 전전하면서 공밥 묵고 공잠을 자고 가는데, 이절도 하도 유명하니까 그런 떠돌이 중들이 많이 와서 자고 가니까, 이 스님이 주지 스님이 욕심이 많아가지고 그 공밥 묵고 공잠 자는 게 미워가지고 자꾸 그냥 불평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루 어떤 노장스님이 한 분 왔읍니다. 그래서 그 소리 들으니 민망스러워서, “그래 이 절에 손님 하나도 안 오도록 내 해 주지.” “어떻게 하면 되겠읍니까?” 저 입구에 아까 운흥동천이라고 써진 그 바위 옆입니다. 거기 선자암(扇子岩)이라고, 선자암, 부채 선짜(扇字)인데, 부채를 쫙 펴면 손잡이하는, 짝 펴면 손잡이와 같은 고 자리가 부채 하부라 그러는데, 그 옆으로 부채살 모양으로 산이 쫙 퍼져 있는데, 그 선자암 그 모랑이(모퉁이)를 싹 돌아가야 절로 올라가도록 되어 있읍니다. 절 들어가는 입구인데, “선자암 모랑이 바위를 석수(石手)를 불러다가 깨뜨려 버려라.” “예.” 좋다고 그냥 석수를 불러가지고 선자암바위를 깨가지고 탁 재치니까 떨어진 바위 조까리(조각이)가 저어게 계곡으로 그냥 굴러 떨어지면서 피가 그냥 선혈이 벌겋게 쏟아지면서 그 밑에 한 마리 탁 떨어지는데, 보니까 용이 득천할라고 그러는데, 미리 아주(아직) 때가 못 되었을 때 바위를 깨뜨려 버려가지고 용이 죽어가지고 자빠졌다. 그래서 대단히 마음이 섬찍했는데, 그 뒤부터는 그 절에 식객이 떨어지고 식객 떨어지니까 그 다음에 불미(佛米) 가져 오는, 불공하러 오는 신도도 끊어지고 그래서 스님 혼자만 그 큰 절을 지키고 있다가는 나중에 도저히 배길 수 없어서 스님도 도망을 가 버렸다하는 얘깁니다. 그 절이 나중에 임진왜란 때 병난을 만나가 또 폐찰이 되고 했다하는 그런 전설입니다.한국구비문학대계 8-12 본문 XML파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