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정보

제목
정의고을 설촌 유래와 옛 풍습
자료분류
설화
조사자
김영돈, 강영봉
조사장소
제주도 남제주군 표선면
조사일시
1981.05.12
제보자
송지준
조사지역
제주도

음성자료


구연상황

성읍리는 민속마을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제주도는 방어의 필요에 따라 1416년(조선조 태종 16년)부터 1913년까지 약 5세기 동안 제주목(濟州牧) 대정현(大靜縣) 정의현(정義縣) 3현으로 나누어 통치되었었는데, 1416년에 성산읍 고성리에 마련되었던 현청 소재지가 1423년(조선조 세종 5년)부터는 성읍으로 옮겨서 약 500년 동안 그 도읍지가 되었었다. 따라서 성읍리는 ‘정의고을’, ‘정꼴’이라고도 불린다. 성읍리에는 현청소재지로서의 유적과 유풍이 더러 남겨져 있고 주민들의 집구조가 유다르기 때문에 많은 분들의 관심이 드높다. 조사자는 25년 전부터 이 마을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자주 드나들었다. 송지준(宋之俊)씨는 혈육처럼 가까와진 분이다. 그분의 며느리 오국희씨 집에서 이분의 도움으로 민요를 녹음했고, 이분에게서 설화를 들었다. 우선 설촌 유래와 옛풍습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는 꼭 설화라 할 수는 없으나 그 내용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여기 소개한다.

채록내용

조사지역: 제주도/남제주군/표선면
    분류코드: [표선면 설화 1] 
    테이프번호: 표선 4 앞
    조사장소: 성읍리
    조사일: 1981.5.12.
    조사자: 김영돈, 강영봉
    제보자: 송지준(남, 83세)
    정의고을 설촌 유래와 옛 풍습
     * 성읍리는 민속마을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제주도는 방어의 필요에 따라 1416년(조선조 태종 16년)부터 1913년까지 약 5세기 동안 제주목(濟州牧) 대정현(大靜縣) 정의현(정義縣) 3현으로 나누어 통치되었었는데, 1416년에 성산읍 고성리에 마련되었던 현청 소재지가 1423년(조선조 세종 5년)부터는 성읍으로 옮겨서 약 500년 동안 그 도읍지가 되었었다. 따라서 성읍리는 ‘정의고을’, ‘정꼴’이라고도 불린다. 성읍리에는 현청소재지로서의 유적과 유풍이 더러 남겨져 있고 주민들의 집구조가 유다르기 때문에 많은 분들의 관심이 드높다. 조사자는 25년 전부터 이 마을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자주 드나들었다. 송지준(宋之俊)씨는 혈육처럼 가까와진 분이다. 그분의 며느리 오국희씨 집에서 이분의 도움으로 민요를 녹음했고, 이분에게서 설화를 들었다. 우선 설촌 유래와 옛풍습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는 꼭 설화라 할 수는 없으나 그 내용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여기 소개한다. *

이 성읍리(城邑里)(1)-南濟州郡 表善面 城邑里. 1423년~1913년 사이 약 5백년간 제주도가 三縣分立 統治되었을 때의 旌義縣의 縣廳所在地.-가 근본에 5개동이랏는디(5개동이었는데) 지금의 이성안동네가 진사리(2)-城邑城 안의 구역에 대한 옛 지명. 晋舍里.-엿고 또 그 성밧끄드로(성밖으로) 저 죽성밧그로(밖으로)저디(저곳에) 가면 가원리, (3)-城邑里 마을안의 地名.- 또 저디 서쪽으로 나가면 거천이, (4)-上同.- 또 그서쪽으로 가면 영전이, (5)-上同.- 또 그 웨로 내려와서 호근이, (6)-上同.- 5개동에 거주헤엿는데 그 세종 5년에 이 정의, 근본에 정의면(旌義面) 고성리(古城里)(7)-南濟州郡 城山邑 古城里, 예전 제주도가 三縣分立 당시 1416년~1423년사이에는 古城里가 旌義縣의 縣廳所在地였으나 나중에 城邑으로 옮아감.-에 설치되어 잇는 현(縣)을 그때에 [조사자: 여기 사투리로 말여 줍서(말하여주세요).] 경헙쥬게(그리하지요). 이치엿는데(移置했는데) 그 때에 정간(鄭幹)이란 분네가 제주 안무(按撫使)로 와서 그 정간이가 직접 그 현청을 시찰헤가지고 여기가 현청이 적당치 안타고 성산(8)-南濟州郡 城山邑 城山里.- 해안이 가까와서또 우도섬(9)-행정구역으로는 舊左邑 演坪里. 마치 소가 누워 있는 모습을 하고 있어 ‘牛島’, ‘소섬’이라 불리운다. 제주도의 부속도서로서는 가장 큰 섬인데 12개동으로 나누어졌고 3천 수백의 주민이 살고 있으며, 어업과 해녀작업으로 유명하다.-이 저쪽에 잇어노니깐 왜(倭)놈들이 수침기 따문에(때문에)여기가 불리다고 헤설란(불리하다고 해서는) 그 정간이란 분네가 직접 친히 당사를 헤가지고 이 성읍리에 와설란(와서는) 모든 지형과 모든 것을돌보고서는(돌아보고서는) 여기로 읍을 옮겨서, 여기 현청(縣廳)을 는 것이 좋다고 지적을 헤가지고, 그래서 세종 5년 정월에 성을 먼저 여기 쌓고, 성을 쌀 때엔(쌓을 때엔) 제주도민 전체를 동원시긴(동원시킨) 것은 그때에 군부에서 정부문이라고 헤설란 요새에 군령(軍令)이여, 군령인 것만큼(군령인 것인 만큼) 그 정부문을 발부헤설란(발부해서는) 총동원을 시겨가지고 십 삼일만의, 열 사흘만의 이 성을 완료헷답니다(완료했답니다). [조사자: 열사흘만에] 음. 그래서 그 해 구월에 모도(모두) 청사를 왠겨설란(옮겨서는) 여기에 현청 대청사를 웨로 거기 부속 관청이 만헷지요(많았지요) 웨 그런고 니깐 현청에 부속뒌 디가 질청(質廳), 도청(都廳), 예변청(禦邊廳), 과상청(寡裳廳), 교련청(敎鍊廳) 그래 그 구비뒈엇고 또 옥터, 옥을 맨들아설란(만들어서는) 거기에 맨들앗고(만들었고) 창방, 군기고, 현사향청(鄕廳) 전부이(전부가) 그디에(그곳에) 부속관청을 모도 설치헤설란(설치해서는).
 옛날 우리 이조 때에 관습에서는 효도를, 충효를 크게 생각헤설란(생각해서는) 모도 백성을 다스리는데 중요법도로서, 도리를 지커고(지키고) 예법을 귀중히 헤설란(해서는) 모도 살아가는데 그러한 문화적인 말(정말)우리 생활이 그때만치(그때만큼)  쪽으론(한 편으로) 편안헷다고(편안했다고) 는데, 말엽에 와서는 부정부폐가 만헤설란(많아서는) 매관매직이 시대에 당니깐(당하니깐) 원님는 사름덜이(사람들이) 여기(10)-여기서는 ‘제주도’-에서 재산을다 려가지고(팔아가지고) 서울로 올라가설란(올라가서는) 구직(求職)을 다고 헤설란(한다고 해서는) 어느 대신을 붓잡앗던지(붙잡았던지) 이러한 뱃심으로 돈을 들여설란(들여서는) 원님을 벌고 들어오면 그때에야말로 말백성이 못전디엇던(못 견디었던) 것이여.
 웨 그런고 니 (참) 탐관오리라고 헤설란(해서는) 삼 년 동안, 임기가 삼년이니깐 삼년 동안에 기(자기가) 들인 돈을 추분랴  것 트면(보충하려고 할 것 같으면) 이거 없는 줴(罪)를 만들고 줴 없는 백성을 잡아다가설란(잡아다가서는) 그 사름을 젭질어설란(짜서는) 그 돈을 끌어내고 헤설란 삼 년 동안 기 돈을 보충려 니깐(보충하려 하니깐) 부정이 나옴(11)-여기서는 ‘부정이 생기다’의 뜻.-과 동시에 라(따라) 또 민간도 역시 부정이 거기서 일어낫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조 말엽에 우리 민간들이 큰 고통을 받앗고. 옛말을 들으면 고줄레라고 여기 정의원님으로 왓는디(왔는데) 아 여기 와 들으니깐 저호근이 허부자라고, 허부자옌 (허부자라고 한) 부자가 나 잇으니깐 배가 이만큼 고 몸집이 아주 들튼 사름인디(사람인데) 아 부자가 잇다고 니깐, 
 “아 잡아드리라.”
고. 잡아다가설란(잡아다가서는) 아 이제 허부자는 미릿에(미리서부터)(12)-여기서는 ‘진작서부터 ‘의 뜻.- 내가 줴는 없지마는 관(官)에서 불러가니깐 내가 고통을 당 것이라 데, 사름이 뒘뒘이(됨됨이) 위인격이라. 니깐 내가 답변을 문 드러치렝 걸로(들이뜨려 넣으려 할 것으로)(13)-’投獄하려 할 것으로’의 뜻으로 쓰임.- 작정을 고 따라오니깐, 아 데령니, 
 “자기는 무엇을 먹고 졋느냐(살쪘느냐).”
묻는다 말이여.
 [조사자: 진 게 줴로구나마씸(살찐게 죄로군요).) 예, 진 게 줴. 배가 이만큼고. [조사자: 웃음] 음.
 “뭘 먹고 그렇게 졋는고.”
 “예, 저는 보리밥과 콩닙에 뒌장에 먹어서 졋습니다.”
 “그래요.”
 육지사름이니깐 육짓말로, 
 “그래요.”
 “그러면 보리밥곡, 콩닙곡(콩잎하고), 뒌장곡(된장하고)가져오라.”
고.
 “나 앞이서 먹으라.”
고. 그러니깐 이 분네가 역부러(일부러) 콩닙을 뜯어오니깐(따오니깐) 콩닙을 뜯지 않고설란(따지 않고서는) 그냥 줌으로 푹 쥐어설란(줘어서는) 보리밥푹 그레(거기에)  술 떠 놓고설란(놓고는) 뒌장 아마  반 술닙쯤(반 숟가락쯤) 탁 놓고설랑 역불(일부러) 일로부터 먹어가는디 양 개미로 퍼렁(퍼런) 물이 갈갈 리게 활활 흐망흐망 먹어가니깐 끄막끄막멍(꿈뻑꿈뻑하면서) 아
먹어가니 [일동: 웃음] 원님이 잇다가, 
 “아 그렇게 먹으면 지겟네(살찌겠네). 아 나가라.”
고. 그래 나갓다고 헤. [조사자: 예.] 이제 기네 친족간 큰아바지(伯父)가 뒈든지 족은아바지(季父)가 뒈든지 문묘다고 헤설란 벌초(伐草)(14)-祖上墓所의 잡초를 베는 일. 제주도에서는 음력 8월 초하루를 기해서 일제히 伐草한다. 掃墳.-를아니헷다고 니 아 벌초를 아니헷다고 니 이게 트집이 뒈어설란 잡아다가, 
 “내가 당연히 당숙의 이제 제살 아니헷다.” 고.
 “벌촐 아니헤서 이 괘씸ㅎ 놈이라.” 고.
 “이놈 곧 잡아다 가두라.”
고. 그려면은 아 이제 큰일낫다고 헤설란 돈을 앚다(가져다가) 바치거든.그래서는 나오고 나오고 헤설란 뭘고 멍 이조 말엽에 살아 왓엇고.
 또 이 ‘쉐곡’이라고 헤설란 목장을 그때에 말엽 뒈어가니깐 국마(國馬)가 쉐진(衰盡)여가니깐 목장밧(목장밭) 덜을 갈아설란 여기서 피를 간단말이여. [조사자: 뭐라고예 ?] 아 목장, 아 그 목장 모든 게 쉐약헤설란 그저 국마가 이제 쉐약헤부럿덴 말이여(쇠약해 버렸란 말이여). 없어져가니깐목장을 게간기 시작헷는디 거기 갈면 쉐곡 노레(놓으러) 간단 말이여.궤곡이라고 면 이 을에서 인사(人士) 뒌 사름덜(사람들) 가설란 노는디(놓는데) 대접이나 잘 곡 뭘민 재력(財力)이나 잇고  사름은 만일  천평을 경작을 헷으믄(했으면)  삼분의 일쯤 체곡을 내고 체곡이나 읏고(없고) 대접이나 그날 황당 것 트민(같으면) 아 그냥 트러내부러. 니(그러니) 그 버은 것 삼곱 이상 추리랴고 면(치르려고 하면)이건 버은 소득보담도(소득보다도) 거기 보충느라고 그 애를 쓰고 살아왓다고.그래서 그 제도가 아 오래지 아니에(아니해서는) 그 일본 일정이 들어와설란 우리덜이 좀 숨을 쉬엇고. 또 우리 성읍리에 근본은 농민들이 적고 디(한데) 할량(閑良)덜이라. 관청소재지(官廳所在地)라설란 상퉁이나(상투나) 매끈게 차고 망건이나 똥끄랭이(동그랗게) 써설란 떡 망을 서서(15)-높은 곳에 을라서서 사람의 오감을 살피는 일.- 영(이렇게) 망을 본다 말이여. 그때 이건 삼문(三門)이니깐 동ㆍ서ㆍ남문 어디, 눈으로 어디 촌사름(16)-城邑里는 縣廳所在地였으므로 城邑里 이외의 마을을 ‘촌’이라 일컬었었고城邑里 이외의 마을 사람들을 ‘촌사름(시골사람)’이라 했었다.-덜이(시골사람들이) 보이나 이렇게 헤서는 보고 잇다 말이여. 면 촌사름이 나나 온 줄 알 거 트민(알 것 같으면) 밤인 기생방에 날라다 놓고 말이여. 방돌림 소릴(17)-방에 앉은 사름들이 차례로 노래를 부르며 즐기는 일.- 다 말이여. 목침(木枕)을 놓고설란 목침 돌림으로써 례대로 헤설란 그 사름밋테 가설란(그 사람한테 가서는) 끗테가면 소릴 잘 민, 
 “장원 내놔라. 소릴 잘헤시니깐 장원 내놔라.”
그러고 못민, 
 “벌졸 내라.”
그래설란 [조사자: 잘헤도 벌, 못헤도 벌?] 잘헤도 벌, 못헤도 벌 받앗다말이여.그래설란 촌사름덜이 들어오길 두려워헤. 무서워헤설란 촌사름여기 들어왓다면 벌벌 떨엇쥬.
그리고 관청이서 령(使令)덜이 여기에 경찰관이여. 령들이 권력을 씻단 말이여. 령들이 령복 입지고(입히고) 방울 고(달고) 줄레줄레 헤근에(해서는) 어느 촌가(材家)에 척 들어가면 부인덜이 물에 물허벅(물동이)(18)-제주도 특유의 물동이. 모양이 등글며 배가 불룩하고 뒤의 아가리는 아주좁은, 물을 길어 나르는 동이. 줄여서 ‘허벅’ ‘허베기’ ‘헙데기’라고도 한다- 지연 가다가(지어서 가다가) 다 숨엇쥬게(숨었지).
“아이고 령왓져. 무슨 일이 우리 을에 큰일이 당헷저.”
다 숨어버려. 아 이놈덜이 어디, 
 “아 누구 가 잡아오라.”
면은 다 집에 들어가게 뒈면 큰 동네는 뭐 (닭) 뒈야지(돼지)가 그 임자가 없어. 유자재로 밤에 확 걸려다 잡아먹고.
 “뭔 떡분에(때문에) 어떤 떡분에 왓노라.”
고 헤설란 그 부인을 붓들려(붙잡아) 관가(官家)에 잡아오고 이렇게 헷다말이여. 민 성읍사름덜은 그렇게 모든 령위치 그런 관 관속(官屬) 뒌 그런 분들이 가설란 불량을 떨엇지만 그 름에 성읍사름만 어디 청강 나 부치면, 
 “아 성읍사름 오랏저이.”
 “어디 무슨 따문에 성읍 사름 보인다.”
고 아 그렇게 두려워헷어. 그래서 령 지내여난(지냈던) 사름덜 얘기 들으면 아 그것은 기네 자랑 비슷이(비숫하게) 말지마는 우리 어린 때 듣기엔 지금 뒈세겨(되새겨) 보면 괘씸기 짝이 없엇단 말이여. [조사자: 웃음] 아 여기에 조중이라고 그 령 끗나서 늙어가니깐 손자놈이 찌(같이) 글 읽엇는디(19)-제보자 송지준씨와 함께 書堂에 다녔었다는 말.- 아 놀레가면 그 조중이 옛말빗듯이 말을 다 말이여. 하 우리가 예천을 갖는디 아 흰 빙애기 인 이(병아리 딸린 닭이)여나믄 개 인 이 밧골창이에(밭 굴헝에) 나와설란 아 헤어볼 덴 없고 뒤칩에 가설란(뒷집에 가서는), 
 “아 이  임재가 누게냐?” 고.
 “아 우리 이옌(닭이라고).”
 “아 큰일낫다.” 고.
 “관가의서(관가에서) 흰  여나믄 개 인  주인 잡아오라고 헤설란나가 나왓는디 당신 가야겠다.”고.
 “아 어떻게 느냐.” 고.
 “날 살려 달라.” 고.
 아 을 데엿 마리 주렌 니깐(달라고 하니깐) 을 심어주언(잡아 주어서) 그놈 앚단(가져다가) 먹엇고렌(먹었다고) 아 이렇게 자랑스럽게 말니깐 요새사 뒈세기니깐 괘씸기 짝이 없는 놈이라 말이여. 이런 불량 놈이 잇단 말이여.
 그리고 저 호근이(20)-好近里. 西歸浦市 안에 있는 마을 이름.- 법환이(2l)-法還里. 西歸浦市 안에 있는 마을 이름.- 근방, 요새는 아주 너른(넓은) 도훼지가 뒛쥬마는 옛날은 성읍이 아주 수도로써 음. 여기에 오라야(와서야) 기와집을  봣고 여기 와야 성읍 필지라곤 헤설란 요새 서울칩이만치(서울집만큼)생각여낫쥬(생각하였었지). 그 사름덜이 이디 오란(여기 와서는) 향교 훈장 장의(掌儀)로 온 사름 현청에 와설란 형방, 이방 이렇게  사름덜은모도 호근, 법환이 방면 사름덜이라. 아 그 땐 바로 삼개 관청으로 이 성읍사름덜이 가면 권리가 등등고 그디 가면 죽은 새끼 뒈설란 밤이 가면음대로 궤야지 잡아설란 추렴(出렴)곡 그리고 만약 공술 공궤기(공짜술, 공짜 고기) 막 먹어아졍(먹어서는) 기  일 다고 들어온다 말이여. 그러 불량을 떨며설란 그냥 에 이조 말엽 정도라면 그렇게 망게 낫앗지. 그 정도라면 사름이 못 살앗지.
 경고(그리하고) 성읍사름덜이 그래서 팔월 때 나설란 촐을(꼴을) 그 쉐맥일(소 먹일)청촐을 다 비는디(베는데)여긴 아니거든. 여기 사름덜은가만이 잇다가 이 부근 주위로다가 신풍, (22)-商濟州郡 城山邑 新豊里.- 삼달, (23)-南濟州郡 城山邑 三達里.- 난산(24)-南濟州郡 城山邑 蘭山里.- 사름덜이아 촐눌(25)-가을에 꼴밭에 가서 꼴을 베어다가 마당 구석에 쌓아 두는 露積.-을 헹(해서) 놔두민(놓아두면) 밤이면은 술잔이나 멕이고설란(먹이고는) 촐을 시꺼 도라고(실어 달라고) [조사자: 예?] 촐을 시꺼 달라고. 아어떤 일이나 면 잔 잘 맥이곡(먹이고) 면 그 사름이 놈 헤논 거(남해 놓은 것) 이디 쉐  쉬나믄 여나믄 열 데엿 개 빌어설란 정의놈덜 빌어그네(빌어서는)  잔 잘 멕연(먹여) 다 찌 간다 말이여. 그자 밤이(밤에) 무조건 놈의 눌 헤싸놓고 막 시껀 헤어오라그네(실어 하여 와서는) 여기 눌어노면(쌓아 놓으면) 그러면 그 사름덜이 오랑(와서는) 이게 내 촐이니 내 물건이니 말 못 다 말이여. 꼼짝을 못헤서, 그러니깐 여기 사름은 팔월나도 출도 아니헷어 가만이 앚아 놀다가설란 그 짓을 엿고 또 순직게 농 지어 사는 사름덜은 농 짓고 엿는디 이 성안에 사는 사름덜은 아 낮 뒈면 흑물동산(26)-城邑里 마을 안의 地名.- 아까 온 흑물동산 미끈게 줄 갈라설란 상퉁이(상투) 차고 망건 막 그랭이 썽(망가진 것 써서) 영 상(이렇게 서서)레거든(보거든).
 어디 웨방(外方) 사름덜이 들어오나 헤설란 그렇게 다가 그  시대가 변천뒈설란 말엽이 지남, 지남보담도(지나기보다도)거 일제가 들에와서 그만 뭘 니깐 그놈덜이 말창 퉤거(退去)헤 가지고 다 떠나 버리고 죽어버리고 이런 후에 이 성읍이 농촌화헤 가지고 농를 부지런히 헤설란, 그러나 옛날은 팔월 살기 위헤설란 이때지(이때까지) 먹어버리면 을(가을) 곡석(곡식)을 다 먹어버린다 말이여.
 장녜(27)-貧農家에서 絶糧期인 봄에 곡식을 꾸었다가 가을에 이윤을 덧붙여 갚던 일.- 빗지레(빚지러) 간다고 일로(여기로) 저 조천면 신촌(28)-北濟州郡 朝天面 新村里.- 함덕(29)-北濟州郡 朝天面 咸德里.- 김녕(30)-北濟州那 舊左邑 金寧里.- 근방 죽 나가설란 보리  말 먹으면(31)-여기서는 ‘빌어 먹으면’의 뜻.- 을 들면(가을 들면) 모(메밀) 말가옷(32)-’小斗 한 말 반’의 뜻. 봄에 보리 넉 되를 꾸어 먹었다가 가을에는 메밀여섯 되를 갚는다는 뜻.-을 가져온다 말이여. 그래설란 날라갓읍니다. 보리 여나믄 말 아져오민(가져오면) 모 뜬 거(같은 것)  섬 지어 온다 말이여. 그래설란 늘 다가 그래도 일제 후에 농촌 와설란 농곡을, 오곡을벌려서 여기 잘 뒈여 가니깐 오이려 여기 곡석이 (곡식이) 일년에 삼천 석지 나와. 남아돌아. 옛날 살아온 역를 들으면  쪽으론 설움도 고  쪽으론 괘씸도 헤 붸고. 그런디 요새 와서 다시 우리가 새시대와 새역사를 이룩하는 마당에 아직도 우리 성읍은 자고 잇는 형펜 타 붸우다(형편 같아 보입니다).
[조사자: 옛관습에 대해서 한 말씀 해 주십시오.] 
게민(그러면) 계속 여야  거라. 근데 그 가운데도 일찍도 말헷지만은 우린 질서가 그때는 앗어. 웨 그린고 면은 동네에 어른을 봐서 공경지 않고 거궁는(불순한) 놈은 향교칩으로(향교집으로) 경민장(警民長)이 불러다가 멍석리(33)-’멍석’은 짚으로 새끼 날을 짜서 만든 큰 자리로서 제주도에서는 곡식을 말리는데 사용된다. 여기 ‘멍석리’란 예전에 멍석 위에 사람을 눕혀놓고는 멍석과 함께 말아서 고통을 주던 벌을 말한다. 멍석말이.-헷다 말이여. 멍석에 어퍼(엎어) 가지고 무꺼(묶어) 가지고 말이여. 그래 그 매로 때려 가지고설란 징계를 헷고. 그리고 부모에게 불효 사름이라던지 친족에 불목다거나 이런 사름은 아주 엄중히 처단을 헷고, 또 관가에서도 그럴 뿐 아니라 을 경민장이 소소(사소한) 것은 처리고 만일 너무나 중 뭣이라면 관가에 일러 가지고관가에서 처리도록이 그때 헷는 만큼 그때만큼 질서는 앗고, 그러니깐 을에 오소임이라고 헤설란 경민장 이하 동장 연상상 구찰장 좌지 오소임이 설치헤설란 동네에 불량 사름이던지, 혹은 그러 불경, 그러 또 어버이를 박접 그런 사름, 또 효도가 부족 사름 이런 사름덜을 모도 을에서 징계과 동시에 관가에서도 걸 히니깐 그때만름은 질서가 혀서 반드시 향도를 모여서 요새민 공훼당(公會堂)이지. 상층이 다 안즈면 웃자리에는 연장자덜이 앚고 그 밋흐로 젊은 사름이 앚지만은 반드시 무슨 건의 말이 잇든지(있던지) 무슨 문제가 잇으면 촌장안티(촌장한테)우선 의견을 물어서 알로  밀려워설란(아래로 차차 미루어서는) 단결을 헷지. 요새 모냥으로 유자재로 어린 놈이나 젊은 놈이나 늙은 이 말은소용없다고 거궁거나 이렇게는 아니헷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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