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연상황
앞 이야기에 이어 계속 구연하였다. 구연 솜씨가 뛰어나서, 암태도에서 실지로 있었던 소작쟁의에 관한 실화를 실감있게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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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지역: 전라남도/신안군/암태면 분류코드: [암태면 설화 18] 테이프번호: T. 암태 2 앞 조사장소: 단고리 조사일: 1984.6.9. 조사자: 최덕원 제보자: 김정섭(남, 62세) 암태도 소작쟁의 *앞 이야기에 이어 계속 구연하였다. 구연 솜씨가 뛰어나서, 암태도에서 실지로 있었던 소작쟁의에 관한 실화를 실감있게 이야기했다.* 옛날에 우리 면에 태석씨란 분이 청춘 면장을 하셨는디. 그분이 면장을 하실 때 당시에 세 농민들이 고충을 당할 때에 하도하도 소작료 관계 때문에 지주들과 참 알력이 많고 또 뿐만 아니라 소작료를 받을 때에 당시에도 그 부자들이 가죽부채로 부쳐가면서 소작료를 받고 나면 보며는 자기네들의 생산량에서 참 먹을 것이 없이 노력만 제공했지 먹을 것이 없이 참 그렇게 착취를 당했다 이런 생각을 했어서 그분이 소작쟁의를 시작할때게 근본은 뭐 정위쟁이운동을 할란 것이 아니라 되도록이면 가련한 국민 농민들을 쪼금 도와주자는 입장에서 그런 일을 시작했다고 생각합디다. 그런데 그것이 차근차근 참 그 타협이 안 되야서 그 참 농민들과 부호들간에 사이가 생기기 시작했던 것이 결국은 소작쟁의라 하는 큰 명칭을 갖게 되얐읍니다. 저도 잘 모르는 일이지마는 내가 어른들한테 잘 이야기를 들은 바 그대로 기역해서 말씀을 드리자며는 에 태석씨 그분이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되도록이면 우리 면민들을 어 참 복리를 위해서 되도록이면 도움을 주기 위해서 시작했든 것인데, 그분이 청춘 면장을 할 때 당시 그나마 농민들의 참 고충을 알고 그 소작료를 감해 달라 이렇게 요구했다가 그분들이 응하지 않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결국에 가서는 투쟁이 되얐든 것입니다. 그래 제일 참 어, 수두격으로 태석씨가 참 앞장에 서고 그 다음에는 박 종남씨, 손 학진씨 이 세 분이 서로 힘을 합해서 쟁이 운동이 생겼는데 첫째 이 종남씨도 참 설득력이 좋았고 그만한 학식도 넉넉했었고 또 손학진씨도 사람을 구제로서 그나마 이해관계를 설득을 시켰었고 이런 분네들이 그렇게 쟁이를 시작했든 것인디 실지로 그때 당시는 이 참, 부호가들이 십에 팔, 구할을 다 가져 갔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 소작료가 비쌌든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러냐 그러면은 소작료를 가지고 가며는 쪼금 여물이 덜 든 것은 전부 가죽부채로 부쳐가면서 소작료를받고 말을 흔들어 가면서 받고 이랬을 때게 그 사람들이 얼마만치 참 에 농민들이 가슴이 아팠을 것이냐 하는 것도 생각해 볼 때께 과연 그래겠다하는 것을 나 자신도 느껴집니다. 그래서 그때 당시 에 태석씨나 종남씨나 손학진씨가 그 일을 시작할 때게 순수하니 우리 면민내에서 면민들로하여금 그 억울한 일을 안 당하게끔 하기 위해서 부호들과 결탁을 하다하다 못해서 마 결국에는 마 쟁이라는 명칭이 붙으게 되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 이종남씨나 손학진씨나 태석씨나 우리 면민들은 그 분한테 조끔치라도 참 보답을 못해 준가 하는데서 미안한 생각을 갖고 있읍니다. 그건 저 개인의 생각입니다. 생각입니다. 왜냐 그러며는 현재 태석씨의 비문이 기동리 옆에 가며는 활목으로 돌아가는 고개 옆에가 비가 섰읍니다마는 그것은 그것도 고향은 신성리지마는 천, 김천달씨라고 그 분이 참 그분의 공로를 잊지 못해서 거그다 참 비문까지 세워 났습니다만은 면민들이 거기에 대해서 쪼금치라도 에 같이 동조하는 말씀이 없다 하는데서 제 마음도 아쉽습니다. 다만 이 ‘암태도’란 책자와 ‘도서문화’라는 책자 가운데에 쪼끔 내 생각과는 오기된 점이 있어서 이 자리에서 밝혀 두는 것은 그 이외 분네들이 공로자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을 때게 제가 생각하는 데는 그분들이 참으로 공로자는 그 책자에 기록이 안되야 있고, 제 이진에서 활동한 분네들이 제 최선상에서 활동한 것치로 기록이 되야 있기 때문에 저로서는 쪼금 아쉬운 점이 있어서 이 자리에서 밝혀 두는 바입니다. 우리가 암태면에서 발족해서 전국적으로 이 소작쟁이가 확산이 되얐을때게 그분네들의 그 투쟁 그 실력이 없고, 그만한 노고가 없었다 하며는 전국적으로 그 소작쟁이 문제가 다만 십년이고 이십년이고 뒷떨어져서 저 쟁이가 되얐을 것이다고 하는 것을 생각해 볼 때게 우리나라 전 소작인들은 그때 당시 참으로 큰 도움을 받았다고 저로 봐서는 자부하고 싶은 생각이 있읍니다. 그래서 소작쟁이 당시에 한가지 애로점을 말씀드리자며는 내가 듣는 말이지마는 태석기가 목포경찰서에 끌려 가서 그 사실여부를 규명을 짓고 우리 면에 남강진이란 데를 돌아올 때게 거그서 문씨네들 그 부호가들 그 사람들 패거리와 다툼이 생겨서 서로 죽고 사느냐를 판가름해서 다툼이 생겼는디, 신지 본동 누 칙실지붕 섯걸을 빼갖고 서로 다텃다는 그런 얘기도 있읍니다. 그럴 때게 먹고 사는 것이 그만치 중대하고 우리가 착취 당하는 것이 너무나 억울허기 때문에 그런 마, 그런 일이 생기지 않했냐 하는 것을 나는 자인하고 싶습니다.한국구비문학대계 6-6 본문 XML파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