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정보

제목
지명 유래
자료분류
설화
조사자
최정여, 박종섭, 임갑랑
조사장소
경상북도 군위군 우보면
조사일시
1982.08.10
제보자
박영화
조사지역
경상북도

음성자료


구연상황

앞의 이야기가 끝나고 술잔을 돌려 서로 권한 뒤에, 제보자가 나서서 시작한 것이다.

채록내용

조사지역: 경상북도/군위군/우보면
    분류코드: [우보면 설화 8] 
    테이프번호: T. 우보 2 앞
    조사장소: 나호 1동
    조사일: 1982.8.10.
    조사자: 최정여, 박종섭, 임갑랑
    제보자: 박영화(남, 64세)
    지명 유래
    *앞의 이야기가 끝나고 술잔을 돌려 서로 권한 뒤에, 제보자가 나서서 시작한 것이다.*

에 우리 나호동은 머 면(面) 군(郡), 다 소재 안해도 그건 다 알꺼 아니겠어. 우리의 어 우리는 머 신라 시조왕 이후에 다 팔 대군의 자손이라카는 우리는 월성대군의 자손은, 우리는 월성대군의 자손이여. 알아 들었어? 이짝에는 다 지금 말 안해도 세상에는 월성대군의 머 카만 그건 다 아는데, 우리 원 월성대군의 어 훨씬 중조에 내려와서 고려 려말 때에, 여 고려 말에 말이여. 어 좀 상세히 말하자만 귀 귀자 할배 에 그 어른이 여말에 인제 사정 부령공의 어 벼슬에 계싰단 이말이여.
그래 계시다가 그래 어 려말에 그만 공민왕이가 그렇재. 공민왕 시대에 그 인제 고려 말은 절단나고 이 태조가 등극을 해가주고 이럴 때, 그 저 어른이 이 태조가 등극해서 우리 조상 귀자 그 할배여.
“고만 내한테 와서 안, 그래 인지, 인지 다 없어진 나라 고려를 섬기지 말고, 내한테 와서 같이 합세를 해가지고 우리 나라 정치를 정돈해서 그래 한번 해봅시다.”
자꾸 간청을 했단 말이여. 그래 이 어른이, 
“나는 그거는 모한다. 그 ‘이군불사 충신이요 이부불견 열녀로다’ 카는 게 그 안 있나 그재, 난 두 임금은 못 섬긴다. 그러이까 당신한테는 나하고, 나는 안한다.”
카고 그래 인천 장아산이여, 지금 인천 장아산이라 카는 거 아이가(아니가) 장아산에, 장아산이 우에 쓰는고 카먼 나 아(我)자 숨을 은(隱)자 그재. 나는 장아산이라, ‘나는 이산에 숨었뿐다’ 캐서 그 어른으로부덩 장아산이 생깄는 거라. 장아동이라 지금 돼가 있어. 있는데 그래 장아산에 딱 숨어삐시고, 그래 ‘우정불기’라. 이태, 태조가 우정불기라.
“여보시오 가지 말고 날과 여어 와서 국사를 의논합시다.”
“나는 아한다. 아한다.”
이카고 환산하시고, 그래 장아산에 숨었뿐 때문에 그 산명(山名)이
장아산이여.
그래 거어서(거기서) 숨어시가지고 내중에 망경대를 맨들었어. 큰 말래이, (1)-큰 산 꼭대기.- 인천 장아산 산말래이에 가서 망경대를 맨들어가 다 망해고, 고만 고려를 임금을 자꾸 그 그 공명왕을 이래 심기가지골랑 고려 임금의 심긴다 이래 됐잖애요. 그 그래 결국 거어서 돌아가시니까, 하이 그 또 그 동명이고 그 산명이고 ‘장아산이다 그 장아동이다.’ 이래 돼가 있어. 우리, 그랬는데 [청중: 그때는 개성 도읍지에 도읍을 하셨다.] 그래 개성이니까, 그래 인제 망경대를 마아서 인제 서울, 망경 서울 경자는 서울 아이가, 개성이 서울이이까 개성을 이래 봤는데, 이 태조가 처음에는 맹 개성 그 자리에서 서울 안 했어? 서울 했거든, 이래 가지고 고만 그 어른이 거어서 숨어가 거어서 돌아가셨어. 그 산소도 거 있고 다 있는데.
그래 그 어른 아랫대는 관자 카는 어른이여. 관자카는 이 어른은 그 아부지가 그랬든 설마드라 사람이, 머 백성이 되면 으이 또 나가 벼슬을 해야 될꺼 아이가?(2)-비록 부친은 이태조를 섬기지 않았으나, 그 후손은 조선의 백성이 되면 으례이 또 나가서 벼슬을 해야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조에 와서 광주 부윤하고 대제학 하고 벼슬을 하싰단 말이야. 아부지 그렇다고 그래 저 상통 안할 수가 없다. 그래 벼슬 하싰는데, 내가 참 여개 너무 심있어는 안되겠는데, 그래 인제 그래 가지고 인제 광주 부윤도 하시고 대제학도 하싰어, 그래 산소는 지금 장아산에 다 계시고.
그래 그 뒤에 에 태종태세문단세 아이겠어? 그래서 으 그래 단종조에 와서 참 국사 이래가 세종조이고 이래서, 그래 그때에 휘자 옹자 카는 이 할배 형제분이 계싰거든, 그런데 휘자 카는 그 어른은 맏어른 서울서 그래 계싰고, 옹자 카는 우리 할배는 그머 어 숙질 아이가 그재, 세조 단종을 조카를 그거하고 세종이 그래서, 이머 우리 할배는 아이고 국가에서 이카
이께네, 아이 여 이리 살아가지고는 안되겠고 또 잘못하믄 어 피해를 입고 하이께, 그래 고만 남랑을 해싰뿠다 말이야. 그래 경상도 내려오싰거든. 그래서 경상도에 와서 자리 잡은 데가 우보면 고산리다. 고산리라카모(3)-고산리라 하면.- 이 근방이여. 그때는 미적이지 머 어예 요새매이로 그래 확실찮으이, 그래 고산리다. 그래 이 근방에 와 자리 잡으시가지고 그래 우리가 으 옹자 할 배 그 어른, 그 어른이 자제 한 분인데 이자 문자 카는 어른이야. 이자 문자 카는 그 할배가 자제를 삼형제분을 돘다 말이여, 도가지고 맏자제 형자 손자 카는 이 어른은 우리 소모이거든.
그래서 자제, 둘째 자제 세째 자제를 데리고 이 어른이 그마 도 평안도, 사 평안도 귀성, 평안도 귀성으로 둘째 세째를 데리고 가싰뿌리고, 맏자제의 형자 손자 카는 이 어른만 여게, 
“너는 여게 근거를 잡아 살아라, 니 자손 데리다가.”
카고, 이 어른은 포부가 커시니까, 
“나는 평안도 귀성으로 가가지고….”
응 그때 난리 세월 아니겠어. 그래 둘째 셋째 자제를 데리고 도 평안도 귀성으로 가싰부맀다 말이야. 그게는 지금 우리 여개 월성 박가 보다 그 더 많을 동 모를거여 사실, 그래서 맏자제 형자 손자 그 할배 자손이 우리가 여 한 오백 호 여어만 해도 산다 이 말이야. 또 경주도 살고 머 흥해도 살고 마이 살아요. 머 수천 호다, 이래 살았는 거여.
이래 살았는데, 그래 인제 에 우리 여게 오신 시조는 옹자 할배가 내려 오시가지고 이자 문자 카는 그 어른은 자제 그 어른은 옹자 할배의 자제거든. 그래 그 자손이라. 여어 수천 호가 산다 캐도 경주고 마카 그 자손이거든. 그래 살아가지고 오늘날까지 인제 여 내리 왔는데, 그 뒤에 에 우리 어부동이라 카면 이 우보면 내에 어부동 카는 동, 동리가 아이고 한 고을이여. 달산 요새 말하면 달산, 이전에 에 고산, 고산인데 그 인제 자리를 잡아가지고 한 동네가 고마 여러 수십 정도 되는 산이고 머고 전부 우리 소유다. 이전에 말하믄 ‘일초일무’ 어 한 풀 한 남긔(4)-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가.- 전부 우리 소유다. 그래 그 어른이 점령해 가지고 살았는데, 근방에 사는 사람이 모두 그 어른의 자손이야, 그 어른의 호기 무기 할배라.
우리 참 우리한테 무기 선조, 아께 우리 형님 말씀하는 무기 선조 카는 효 효행으로 말씀한 그 어른이여.(5)-박영희씨가 구연했던 설화 5에 나오는 무기 선조를 말함.- 그런데 그 어른이 뫼가 특징이고 하이 같으며는, 머 웃대 어른이 응 조부께서 절로 가시고 한데, 
“너는 여 소거해 가지고 여어 살아라 피난지지이다. 여어 살아라.”
이래시가지고 우리가 여 산다 이말이야. [조사자: 이 부락이지요.] 이 우보면에 사는 거여. 사다가 그래 저 어른이 ‘효행이 특별하다’ 아께(6)-조금전에.- 카잖아. 아께 그 말씀인데, 효행이, 민자 수자 호를 무기다. 고건 분명히 해주세요. [조사자: 예, 이야기 하세요.] 민, 휘자는 민자 수자다 호는 무기다. 그라만 저 지금 저거는 묘비도 서고 다 되고, 저 어부동 카는데 가만 고만 한 골안에 전부 우리 조상의 산소도 있고, 정자도 짓고 해가지고 저어 여러 수십 정보를 우리 다 차지해가 있읍니다.
그래 그 어른 자손이다 말이야, 여게. 안 그래. 그 어른 자손인데, 그 어른이 특별히 효심이 많다. 아께 저 어른이 말씀 하잖어, 으 그래서 으 아부지는 조금 머이(아직) 돌아가싰고, 그래서 또 달아서(7)-연달아서.- 어무이가 병이 계싰잖어. 병에 계시니까 그래 어무이가 병중에 머라 카신고 아이라, 
“야아 내가 석의를 먹고 접다.”
인제 그 내가 이중 겉다마는(8)-박영화씨가 이야기한 것을 중복하게 된다는 말이다.-
“석의를 먹고 접다.”
카이, 편찮은 어른이 석의를 먹고 접다고 하이 석의라 카는 것은 어데 방구에 달리는 그 석의거든. 그 오데 보통 있는 것이 아이잖애. 그래 어데 있노 카마 저 부계면 팔공산 카는데 있어. 여게서 제일 팔공산, 팔공산 덤불에 그 방구에 가서 석의를 끌어 온다 이 말이여. 그 우찌 그 절벽에 가서 석의가 그렇게 쉽으나. 석의를 자시고 접다 이카이, 그래 이 이어른이 무기 할배라 카는 그 어른, 민자 수자 이 어른이, 
“아이고 어무이 석의 자시고 싶다 카마 석의를 디리야지.”
그때 어른이 마 밤중에 고마 어무이 명령을 들어가지고 석의 따러 나선다. 나서가아 딱 고을에 나서이까 참 말하면 여산대호가 나서, 딱 길을 막는 거야. 딱 길을 막는 거야. 그래서, 
“아이고 니, 미물에 짐승이지만도 그 니가 우찌 나는 우리 어무이 병환이 거해서 우리 어무이가 석의를 자시고 접다 좋다 캐서 그 석의를 따러 가는 길인데, 니가 날 왜 해칠라 카느냐?”
이카신단 말이야. 카이 그러이 이 대호가 두말 없이 자꾸 궁디를(9)-엉덩이를- 들이댄다. 자꾸 궁디를 든다, 말 안하고 궁디를 들이 대이, 
“그래 우짜란 말이고?”
등을 두드려.
“우짜란 말이고? 내가 너를 타란 말이가?”
카이 고개를 끄덕뜨떡 겄거든. 그래 그 어른이 탔다. 타이 여어서부터 팔공산이 한 밤 팔공산이 질러가도 사십 리여. 사십 리, 그 까짓것 머 어뜻 비호겉다 카잖어. 확 가가지고 고만 사십 리 팔공산 밑에 딱 갖다 대이니, 그래 그 팔공산에 가서 석의를 확 훑어가지고 그 어른이 참 반갑다 말이야. 어서 마 보따리를 들고 딱 내려 오이니, 그어, 그 참 큰 짐승이 딱 바랬고(10)-기다리고.- 있는거여.
“그래 니가 와 여어 이제끔 바랬고 있노.”
카이 또 궁디를 썩 댄다 말이야.
“그 타란 말이가?”
카이, 타라 카거든. 그래 탁 타이니까 머 까짓거 순식간에 막 올 거 아이여. 그래 우리 딱 역사에 다 있는 거여.
그래 타고 오이, 그래 석의를 가지고 오가지고 탁 믹이께네, 고마 참 말하자마 으 형용이 없단 말이야, 그래 그 석의를 갖다갈랑 당장에 낋이가 지골랑 어무이 드리이 어무이 병환이 대방 연에(11)-단번에 곧.- 차도가 있어 차차 나아싰다 안 그렇겠어. 그리 소문이 요새나 지금이나 머 퍼뜩 퍼질 꺼 아이가? 그래 그 이전에도 한 여름에(12)-‘겨울에’라고 해야 옳다.- 에 어는 효자가 어무이가 에 잉어를 묵고 접다 카이까, 그래 그 가서 거울가 가서 이놈의 얼음이 꽝꽝 얼은 데에 가여 울어제낀꺼내 얼음이 탁 갈라져가주고.
“그래 이 얼음아 이 속에 우리 어무이가 잉어를 자시고 접다 카이 내가 우째 잉어를 델고 가노?”
카이 그래 잉어가 툭 틔어 나왔잖어. [청중: 그런 거 있재.] 그런거 다 이 역사에 있을 거여.
그래서, 그랬는데 이 어른도 출천지 효 때문에 어째서 미물에 짐승이 어 그래 밤으로 대노. 요새 말하마 비 과학적으로 말하만 그거 저 머슨 말 꾸미대는 거 아이가 카지만 역사에 다 실기 있는 거여. 이래가지고 그래 그 석의를 자시고 차차 차차 회복이 되시가지고 그래도 오래 못 가지고 연세도 많고 하이 돌아가시뿠다. 그래 바꼍 어른 돌아가신 얼마 안되가 두 어른이 다 돌아가싰다 그래 여묘 삼년을 살았다.
여묘 삼년이라 카만 띠 집을 지이 가지골랑 시묘 산다 카는 거 안 있어? 그래 어부동에 그 가서 시묘 삼년을 으 살고 났는 자리 때문에, 그 영모각이 있어 영모각이. 영모각은 길이, 에 조상을, 부모를 생각한다 카는 영모각이고, 영우정 카는 것은 이 어른이 글도 이르고(13)-읽고.- 했는데 거 영우정, 영모각이 다 있어. 그래 영모각에 에 우리 후손들이 이 어른이 여묘 삼년 살았으니까, 영모각이라고, 그런 그건 다 세왔는 거고, 나제에(14)-나중에. 후에- 조끔 지내서 후손이, 영모각이라고 있고 영우정이 있어. 안 그렇겠어.
그래서 그 어른이 참 말하자만 나라에 고한다 말이여. 이렇기 효자가 있다 이래서, 그 어른이 동관 벼슬, 나라에게 효자란 동관 벼슬을 조요. 동관 벼슬 안 주나? 그래 에 동관 벼슬 안 주나? 그래 에 동관 벼슬을 조 가지고 정, 행직은 아이거든. 정 이조 참의다. 참의 벼슬을 좄단 말이야. 그건 우리 사적에 나타나 있는 거여. 그래 정 이조 참의, 으 호를 그 무기, 무기 우리 무기 선조야. 그래서 그 인제 그런 역사가 있다 카는게 오늘 얘기가 나이까 하는 소리여.
그랬는데, 그 이후에 그 어른이 인제 휘자가 민자 수자거든. 민자 수자이 할배의 자제가 말하자면, 아들이 말이여 삼형제다. 그래서 우리 의흥에 여게 와서는 우리로 봐서는 삼파다. 그 어른은 맏아들이 백파요, 둘째 아들이 중파요, 셋째 아들이 개파 아이겠어? 그래서 백파 집은 여 미성동 세연씨 집 마 사는 그 마을이 우리 백파 집이고, 그 동산동 가마 그집이 중파요, 둘째 집, 우리는 계파 집이다. 어 그래서 그 어른은 [조사자: 인자
나불에 오신 분은 인제 막내이….] 그렇지 그렇지 제일 끝에 집이지.
그래 휘자꺼정 다 말할거야. [청중: 고 때가 몇 년 됩니까? 그런께 대강 몇 년 됩니까? 여게 오신 지가 대강 언젭니까?] 우리가 말하며는, 내가 우리 문중에 그 요전에 회의를 해 역사를 다 봤는데, 우리 할 배가 인천서 오신 정도로 말하면 오백 년, 오백 년 그렇기, 또 인제 민자 수자 무기 할배 이 어른을 말하자면 사백 한 칠십 년. 어, 그래서 그 어른 [청중: 그 나불 이, 나불에 오신 지는 몇 년 입니까?] 여어 나오신지는 그 어른의 자제가 삼형제 분이다.
백파는 미성동이요 중파는 동산동이요 개파는 마 대표적으로 나호동이다. 나불이다. 그때 나호동이 없었어. 나불이다. 그래 나불이 오신 거는 그 인제 삼형제 분의 제일 끝에 집 어른이 응자 휘자 카는 그 어른이, 맏자제는 자제는 부계면 고곡동 가여 살어. 고곡동, 머 이왕 말하면 여물기 말하야잖겠어. 부계면 고곡동 카는 데에 그게 응자 휘자 그 어른의 맏자제가 거어 산다 이말이야. 살고, 그 인제 응자 휘자 맏 자제가 승자 남자라. 머 그런거 다 적을거 있나. 승자 남자 그 어른이 우리 개파로서는 큰집이요.
또 그 어른의 둘째 자제가 종자 남자야 그건 좀 적어 주세요. 종자, 쫓을 종자, 쫓을 종자. 사나 남(男)자. 사나 남자, 남자 남자 그래 이 어른이 호를 유촌이라요. 버들 유자 마을 촌자, 마을 촌자. 그래 이 어른이 마침 임난 당시 선조 때 임난 당시의 어른이거든.
그래서 그때 임난 당시에는 각 처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안 했어. 의병대장의 영남에는 어, 충익공 곽 충익공, 어 곽재우씨 말이여. 그 호를 망우당. 그 어른이 영남에서는 고수 아이가 의병 대장이고.
그래 이 어른도 이 나라에서 이런 왜병이 와가지고 이카는데 우리가 이래 될 수 없다 카고, 그래 이 근방에 으 그 참 장병을 모아가지고, 그래에 그 화왕 산성을 지킸다 카는 거, 하왕 산성을 지키는 거는 망우당 하고 같이 지키는 거여. 화왕산에 그래 인제, 그래 가지고 화왕산성을 응 우리 유촌 우리 선조께서도 같이 가서 왜적을 쳤다.
그래서 창의해 가지고 공신이다 카는 거는 그때 인제 망우당, 곽 재우씨 아이가 그재, 충익공, 또 안동 가만(15)-안동에 가면.- 김 성일씨, 학봉 그렇재. 또 영천 가만 권 운수씨 카는 그 어른이 화산군 아이가? 그 어른들이 전부 고수가 되었거든. 그러이 우리 선조 종자 남자 우리 유촌 선조께서도 같이 동고를 했다. 그래 동고록은 저집들에 전부 다 있어. 동고록이라 카는 거는 이름이 있다 말이야. 요새도 이름이 있지. 그래 동고록에 다 얹히가 있어요. 맥지(16)-괜히, 아무 것도 아니면서.- 요새 머머 까짓것 우리 할배도 머 했다 머 했다 카만 그것은 근거 없으마 안되거든. 그래가지고 동고록이 다 있는데, 그리 그 어른이 임난 때 같이 참여를 해 가지골랑 왜놈을 치고 말이여, 그래가주고 나중에 나라에서 공이 있다 해 가지고 그래 벼실을 으 평안도 순무사, 병마절제 순무사 카는 벼실을 주싰거든.
그래 벼실 쪼매 하시다가 가마이 생각하니 연세도 육십이 넘었단 말이야. ‘마 내가 인제 나라는 평정되었고 이만하이까 나는 인제는 고향에 돌아 가가지고, 내가 자녀 교육도 시키고 참 어 집안에 교화를 씨기가지고 그기 옳지 늙어가지고 이 머 자꾸 이럴 것 없다’ 카고, 그래 그 전원 시를 지싰지. [테이프 교환] 
전원시에 있어서 인자 자손 교육을 시키겠다 이래서, 전원시에 머 한문도 나오나? 궁마초심점각비 그 한문이요, 궁마초심점각비, 처음에는 어 젊을 때는 말이여, 궁마라 카는 활하고 말하고 하는 전장에 가는 거 아이가. 처음에는 궁마초심점각비, 처음에는 나라를 위태로운 거를 구하기 위해서 말과 활을 가지고 전장에 가서도 우리 나라를 구해겠다 카는 이런 마음이 처음에는 계싰다 이말이여. 그래서 이제 왜놈들이 쫓기가고 말이여, 우리 나라가 참 어느 정도 안정이 된다 싶우이 ‘점각비’ 점점 인제 깨닫는단 말이여. ‘나도 나이 많다’ 으이 그래서, 전원심처부라 으이 전원에 와서, 전원은 우리 농원 아이여, 전원심처불귀라 아이 이제 나도 젊을 때 할 만치 했으니 이제는 전원심처불기라, 우리 농촌에 돌아가가지고 논과 밭을 갈아 살펴가며, 우리 자손을 교육하는 기 옳다.
그래 인제 응 전원심처불기, 에, 문전학종선생유요 그래가지고 뜰 앞에 이래 심어놨는 것은 버드남기(17)-버드나무.-를 심거놨거든. 응 그 문전학종의 선생유요. 문전학종엔 이래 모도 이전 선생님부텀 그 노령에 가서 그래 해라카는 거를 해서 버드남기를 마이 숨갔단 말이여.
문전학종유 선생이요, 의구인간노포의라, 사람이라 카는 것은, 으 나중엔 늙어가는 늙어가지고 노포의라, 고마 이 노포라 카는 거는 이제 요새 말해 이전 말해 도포 겉은 거 아이가? 노포의라. 그마 난 늦게 가서는 인제 고향에 돌아가시가지고, 내 자제나 가르치고 우리 참 마 향리에 와서 그런 요새 말하믄 계몽을 해야 되겠다.(18)-柳村先生 田園詩: 弓田門依 馬園前舊 初深學人 心處種間 漸賦先老 覺旣生布 非歸柳衣-
이래 전원시를 짓고 돌아오싰단 말이여. 그래서 자호를 유촌이라. 으 그래가지고 으 이 이 여게 인제 이 골이야. 이 골에. 이 고을에 오셔가지고 그 어른이 자리를 잡으셨어.
잡으시가지고 이제 자슥 자제 교육도 시키고 이 근방에 모도 참 촌동들 모으고 또 향리에 이래 모아서 이래 이래 하다 카는 것은 지휘를 하고 가르키고 하고, 이래 이래 이래셨단 말이여. 그래서 자리를 여 저 이 큰 골이라 카는 데 있어. 그 처음에는 잡으, 자리 잡으시가지고 그래 에 이거는 참 전설이지만도 그 가믄 그때 잘 살아싰단 이말이여. 그 이전 돌 돌로 가지고 판 말을 열 두 마리 말을 한 돌꾸이에(돌 구유) 파가지고 열 두 마리의 말을 메가아 죽 먹도록 했는 그런 돌꾸이가 있대요. 지금도 있대요.
오데 묻었는 가는 모르지마는. 그만하면 머 관경을 알 수 있잖애. 그래가지고 살았이면서 자연에 도양을 하고 전력으로 그만 노령엔 이랬다.
이래서 그래 그 어른이 자제를 사형제 분을 두시가지고 그래 인제 제일 맏자제 되는 응, 머 휘자도 다 해야 되는가는 모드디만도, 맏자제 되는 어른을 이 마을에 으 처음엔 고을에, 이 마을에 그때로 말하자면 주씨가 살았다 캐. 주씨. 어, 주씨가 살고, 그 요새로 맞잖은 소리지만도 그때는 머 부리는 사람이 마이 안 있겠어. 그래 머 주씨, 이씨, 머 정씨 머 이래 살았어. 그런 여어서 울리고 여어 터가 있지. 지금 우리 수백년전이라도 지금 파재끼이까 기왓장도 이런 거이 나오거든. 그래 우리 종가터이다. 그래 유촌 선조 그 어른은 종가이다 이말이야. 그래가지고 그 잘 살고 마 수천 석 하고 이래 살았어.
잘 살았는데, 그 살다보이까 사람이다 카는 것은 권리도 좀 더 할 수도 있고 그러니까 그 조금 쪼금 볼상사도 났어. 너무 권리를 하고 이라니까, 그 좀 불상사가 났다 카는 머 이건 실없스런 이얘긴데, 그래가지고 여어서 인제 수대를 참 말하자면 수천 석을 하고 살았다 이말이여. 그래 산 정도가 인제 우리 유촌 선조, 으 종자 남자 카는 그 어른의 후예가 이 마실에 많이 살았다. 그 어른의 자제를 응 사형제 분을 돘거든. 그래 맏자제만 이 동네 살고, 둘째 자제, 시째 자제는 요 웃동네로 살고, 나호 삼동, 여 살거든. 어 그 또 니째 자제는 저 경주 어데 가서 안 그렇겠어? 그 머 거 가 살고.
그래서 우리 이 나호동의 유래는 우리 유촌 카는 그 할배의 전 후예고 그 어른의 종가이고, 안 그렇겠어? 그래서 요 사는게 한 사십여 호 사는데 우리가 그 어른의 종가로서 여어 사십 호 살고, 그 어른의 자손의 에을반 여어 우보면내 한 삼사백 호가 산다.
그러이 자손도 마이 부르고, 그 어른의 맏자제 그 어른의, 그래서 그 어른을 위해서 재실 지이 논 기, 요 웃동네 그 있어. 경이재라고, 재실을 짓고, 또 그 어른을 위해서 이 유허비를 세왔다. 이 어른이 과거에 이러 이러한 임란에 공적을 하고 유허비를 세왔어. 그 웃동네 가먼 그 도로가 나무 밑에 있잖애. 그 어른의 유허비로 그 어른의 자제 되는 어른, 맏자제 되는 어른이 또 우리 손위되는 어른인데, 그 어른 산소는 여어 가마효령면에 가먼 아주 참 명기 좋은 산소라.
그러이 그 그 어른 자손을 또 많지. 그래서 요 밑에 재실이 추원재라고 있어. 그 추원재는 그 어른에 아랫 대의 맏자제의 재실이라. 추원재라고 있제, 그 산소는 바로 그 계시고.
그래서 우리가 여게 유촌 카는 그 어른이 입향한 제가 임난, 임난이라 카먼 임진왜란 아이여? 임진왜란이 일구 그 저저 일천 일천 오백 얼매든가 그렇대. 일천 오백 사십 년 이든가 그때에부텀 우리는 이 나불에 살아서 오늘날 무기 선조 카는 거는 그 어른의 저어고, 유촌 우리 할배의 후손은 여게 사백 한 칠 팔십 년을 오늘날까지 여어 존속해 산다.
어, 그래서 그 인제 우리 동네 유랜데, 그게 따라서 그 어른이 왜 여게 오싰노 말이야 하필 말하자믄, 저 건네로 저 온 두로 샜는데(많은 데), 왜 하필 오싰노 이라믄 그 유래가 왜냐카믄 이전으로 마 우리 동양으로 봐서는 지명이 있잖애. 그러니 이전에 중국엔동 우리 역산동 모르지마는 우리 역사인동모르지마는, 나는 우리 재종씨 된 참 입으로 웃대 되는 재종씨 그 어른의 말씀을 들어서 알지 난 모르는 거여. 그 이전에 지리상으로 봐서는 ‘오천지상에, 유매화촌’ 하고, 오천동 우에는 매화촌이 있단 말이야. 매화촌, 매해화지상에 유나부하다.
명화촌 우에는 또 나부가 있다. 나부에는 견주월이라, 나부에라 카는데에 가만 낮에도 달을 볼 수가 있다.(18)-梧川之上에 有梅花村하고 梅花之上에 有羅浮하다 羅浮에는 見晝月이라- 그런 그 좋은 땅이나. 안 그렇겠어. 그러이 과역건 오천동이 있어. 요게, 오천동이 있지 효령면. 오천동에 노매실이라 카는 데가 있어. 노매동, 노매실을 넘어서 우리 나불이다 이말이야. 그리 우리 나호동이 나불이다 이말이야. 그러이 우리 나호동이 나불이다 이말이야. 나부에 여나오고, 그리 나불에 오면 응 견주에 저 어, 나호는 어어, 견주월에 가 낮에도 달을 볼 수 있다. 낮에는 태양 때문에 달 못 보는데, 나불에는 하도 말하자면 지명이, 지기가 청명하고 이러이 낮에 달 본다 카믄 여사 청명한 기 아이잖애. 그러이 나부에 견주월에 가 나부에 가가주 낮에도 달 볼 수가 있다.
그러이 이 터가 좋다. 이래서 우리 할배가 여어 복거를 했는데, 우리가 사백 년 살아봐야 머 큰 머 그거는 없어 그러디, 그래도 우리 조상을 사백 년 모싰고, 또 어 이거는 우리 과찬인지 모르지마는, 여 그래도 머 크잖는 우리 군의 군에서도 우리 나호동 어 머 참 내 말에 어렵지마는 이제 위치가 있고, 또 머 그건 심한 소리지마는, 머 그렇기 응 여러가지로 봐서 나호동이 이 나호동이다 카는 머 그런 정도까지는 안 전해 나오나? 내 끝이 쪼금 과한동 모른데, 그래서 나호동의 유래는 내가 알기로 어른들한테 들은 정도로서는 그렇다. 으 그래서 나부에 견주월이다. 그 역사가 어데서 나온동 모르지마는 우리 유촌 할배는 그런 걸 봐서 나호동에 근거를 안 잡았나?
그런데 이 동양에 있어서든지 우리는 요새 근대 사람이라 카지마는 아죽꺼정(아직까지) 정신이 그래 적힜거든 묘가 터가 있어야 된다. 할배 미를 잘 써야 잘 된다 카는 이거는 너무 고수적인지 모르지마는 전연 우리가 무시할 수 없어. 또 뭔가 가마이 이 근바아 돌아봐도 그래도 어는 동네, 지명이 있던 동네 그 머가 머 어쨌든지 나지. 머 머머머 머 수백 년 맹내리오던 데가 이건 좀 좀 너무 그거한 말이지는, 그러니, 머가 터라 카는 것이 있고, 우리 선조께서 뭔가 선견지명이 있고, 어, 그래서 그래 우리 유촌 할배 카는 그 어른의 산소는 그래 진 등에 모싰어. 그래 소위 명산이다.
그래 자손이 많았거든. 그 터를 누가 잡았노 카믄 선산 해평에 가만 최인재라꼬 있어. 전주 최씨에 그집 조상이, 인재 라 카는 그 어른이 벼실도 마이 하고, 또 이 어른이 참 교유한다 하재. 친구 말하자면 친구가 그 어른이고, 그래 우리 유촌 어른 머 인제 사적을 다 말하기는 어렵지마는, 유촌 할배가 임난 참의의 공신이다. 이건 우리가 우리 역사상의 한 자랑이고 안 그렇겠어?
또 거어서 이 어른이 교유한 어른이 다 좋은 어른이거든. 오리, 오리 대감 요새 여 나데, 오리 이 원익 카는 오리 대감 당시에 그 어른의 선조 때 오리 대감 당시인데, 그래 우리 유촌 우리 선조께서 그때 그 광해군 피모소가 있잖애. 피모, 광해군이 나제에 선조 뒤에 광해군이 난잡해 가지고 피모소를 하는데, 우리 유촌 선조께서 피모소를 했단 말이야 참 소를 잘 했어. 참 잘 해가지고 소를 해가지고 올리이 오리 이 원익 대감하고 우리 유촌 선조하고 막교간이야.
참 막교간이까 소를 올리가지고 광해군이 이럴 수가 없단 말이야. 어데 이를 수가 있나 카모 피모소를 올리이, 오리 이 대감이 먼첨 받을 꺼아이가? 그때 대신이니까 말이야. 떡 받아지고 친구간이니까 만약에 이소를 임금 앞에는 가만 고마, 우리 유촌 선조는 자 요새 아아들 말로 그마가는길 아이겠어? 그래나마 오늘 우리 후세에, 그 어른의 우리 후세 자손으로 봐서는, 이거는 안될 말로 그 어른이 그때 소를 상소가 되가지고 임금한테 딱 갔으면 당장 그 어른이 그마 변을 당했을 끼라. 변을 당했다 카마 우리 후손으로서는 오늘날 봐서는 오히려 조상이 드러난 조상이 영광이 점점 더 살아나.
임난 공신보담도 더 찬이될 꺼 아이겠어. 그건 머 우리 자손의 얘기이고, [청중: 웃음] 참말로 그래요. 그래서 우리 광해군 피모소는 우리 유촌 선조 소가 참 잘 되어 머 우리는 그 어른의 문집에 다 나와 있어. 누기봐도 큰 선비가 봐도 참 이 어른 소 참 잘했구나 카는 그런 역사가 있읍니다. 문집에도 있고.
그래서 우리는 나호동에 사는 제가 사백여 년, 또 우리 웃대 무기 선조 카는 그 어른이 이 근방에 자리를 잡았고, 우리 유촌 할배가 어 내한테는 13대 되는 어른인데, 그 어른이 여어 나불을 잡았다. 그 우리 나불이야 우리로서는 우리도 그 저 으 자 참 긍지가 안 있겠어? 하지마는 머 국내에서도 어떻기 알아 주는 그건 모르겠으나마 그 어른이 그만한 국가에 그만한 공이 있었고, 또 피모에서도 우리 자손이 수백 가구가 살고, 이래서 오늘날까지 수호해 나오는 거는 그 어른한테 욕 되도록 안하기 위해서 우리 노력해 살아 나오고 근근히 그저 본정신으로 살아 나오고, 그래서 사백 년 여 년 사백여 년이지? 임난, 임난 경과를 했이니까? 사백여 년, 근 오백 년 우리가 이 나호동을 지켜왔는 그 정신이다, 머 그렇습니다.
우리 나호동 유래는, 나호동을 지었는 유래는 말이지, 에 비단 나자 그렇제, 비단 나(羅)자는 넉사 하고 그 밑에 비줄 유자 하먼 그 비단 나자다. 그렇재. 에 호(湖)자는 호수 호자거든. 물 수 변에 이구하고 달 월 한자 아이가 그렇재? 그래 나호다. 그래 고걸 파자로 해서, 비단 나자는 넉 사 밑에 비줄 유했으니까 사유는 재차간이요, 닛(넷) 비줄은 우리 니 이 이 지구 내에 있다. 으이 그래 호자는 말이여 수월은 고금동이라. 이 나호동에 달과 물은 천년 만년이고 맨 변함이 없을꺼 아이가? 으 그래 수월은 고금동이라 이전이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그래서 나호동이다. 그런 이야기가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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