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자료
구연상황
조사자가 풍수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하니 이 이야기를 했다. 청중들도 이런 이야기를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제보자는 구연이 분명했고 기억력이 우수해서 고유명사까지도 정확하게 이야기했다. 경로당 문간에 걸터 앉아서 이야기했다. 들에 나가는 길이라서 장화를 벗지 않았기 때문이다.
채록내용
조사지역: 경상북도/월성군/외동면 분류코드: [외동면 설화 55] 테이프번호: T. 외동 8 앞 조사장소: 석계 2리 웃돌깨 조사일: 1979. 4. 6. 조사자: , 임재해, 조건상, 정억수 제보자: 최해룡(남, 57세) 홍성지와 여우 구슬 * 조사자가 풍수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하니 이 이야기를 했다. 청중들도 이런 이야기를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제보자는 구연이 분명했고 기억력이 우수해서 고유명사까지도 정확하게 이야기했다. 경로당 문간에 걸터 앉아서 이야기했다. 들에 나가는 길이라서 장화를 벗지 않았기 때문이다. * 홍성지가 출생지가 군위군 소보면 내의동 사람인데. 내의동 사람인데, 후실에 태어난 사람이래. 후실에 옛날 봉건주의 제도 때 봉건주의 제도 때, 후실에 난 거 일모이라꼬 (서자라고?) 머 그 어데 자손 치는기요. 그런데[청중: 그래, 저기 할매 묘사 지내만 묘 밑에 꿇어앉고 그러는데 뭐.]그래가, 댕기기를 어데 댕깄노 카만 서당에 댕깄는데. 내의동 카는 데서 은의실 홍씨 집에 서당에 댕기는 기라. 댕기는데, 서당에 이래 댕기며 그저 미처이라고 걸을(개울을) 이래 건내는데. 저녁에 인제, 이전에는 서당에 낮에도 갔다가 저녁에도 글 지으로 가그던요. [청중: 그렇지러.] 저녁 담(저녁때)에 가며는 반다시 이 여자가 하나 나오는 기라. 처자가 하나 나와가주고, 구실로(구슬을) 홍성지 입에 여어 주었다가 지 입에 옇고 요래 자꾸 이래그던. 고래 하이 몇 달로 인자 댕기미 그래 하이 아가 자꾸 애빈단(여윈단) 말이라. 애비니까, 선생이 지각이 있는 사람이라. “니 얼굴이 자꾸 저 아주 쇠진해 지는데, 와 글나(그러느냐) 연유를 말하라! 반드시 무신 여유가 있다. 연유가 있다. ” 그래가주고 참 그걸 했다. 그래 인자 사자(師丈)이 물으이, 사실이 여차하고 저녁으로 오며는 반다시 이놈의 여이(여우)가 입에 구실을 넣어 처자가 구실로 지 입에 있는 걸 내에 가주고 내 입에 넣어 주고 이래가 결국은 지 입에 가주고 가고 이래 한다. 그래가 헤어지고 이란다. 그라모 갈 때는 내일 저녁에 또 만내자 이카고 간다. “그렇그덜랑 낼이(내일) 저녁에 니가 말이지 당장에 마 입에 여어 주거던 마 꼴딱 냉깄부고(넘겨버리고) [큰 소리로] 하늘 떡 치받아 보고 마 땅을 치받아 보라!” 이거라. 그래가, 그걸 따악 명심하고 그 이튼날 마 잊았부고(잊어버리고) 그 이튼날 못 그랬다. “온(오늘) 저녁 그랬나?” 카이, “못 그랬다. ” 이카거던, 그러이 저 넘이 버러(벌써) [청중: 안다!] 이미 사장한테 조정 받은 줄 알아. 마 딱 서가주고 마, 속히 내노라 이카그던. [큰 소리로 급하게] 어어 그만 벌떡 냉깄 부릿어. 냉깄부러도 하늘은 쳐받아 볼 여가 없고, 냉깃부이, 끌엎어 놓고 마 깔고 앉는 질이라. (1)-홍성지가 구슬을 삼키니, 여우가 홍성지를 끌어 엎어 놓고 깔고 앉는 길이라.- [본래 소리로] 그러만 엎어지가 땅 땅 보고 마. 그리, 머머시고, 사장이 숨어 있다가, 그걸 쳤어(쫓았어). 훗고 인자 그라 노이 풍수가 떡 됐그던. [청중: 지리는 환하다.]인제 지리를 잘 아는데. 내가 이 이애기를 다 하만 그 본소이(本孫이) 날 욕할껀데 곤란한데. 그래가 그래가주고 인제, 그거로 하는, 풍수 행세를 하고 댕기는데. 그래 인자 불교라 불교를 믿고 풍수를 하고 댕기는 데. 한 분은(한 번은) 영천 이씨 영천 이씨가 묘터를 잡아 돌라 이카민서. 그래 어딜 잡았노 하며는 [좌중의 한 사람이 나가서 잠시 중단] 묘터를 잡아 돌라 이카는데. 그래 인자 군위군, 소보면 연곡 질은 동네 영천 이씨가 사는데. 영천 이씨가 삼형제가 사는데, 묘터를 잡아 돌라 이카그던. 이카는데, 인자 그 형제가 삼형제라 삼형젠데. 연곡이 제일 맏 종손이고 두째 집이는 그르만 인자 산웅이고 시째집에는 돌밑 카는데 영천 있그던. 그래 삼형젠데. 그래 이 묘를 파며는 말이지 이 천곽을 대며는 반다시 복판에 돌이 볼가진기(불룩한 것이) 나온다 이기라. 나오거들랑 이 돌로 빼지 말고 마 고래(고대로) 고르고 묘를 씨라 이카그던. 어예칸(하여튼) 맏 맞 상주가, 기여쌋고(기어이), 이거 돌, 그 저 풍수 지가 무얼 아나 이거라. 그 늠이 저 과객이 지가 뭘 알 건데. “안 된다. 빼라!” 이카그던 그러만[청중: 빼만 무신 금 비둘기가 날라 가든지 이래 한다.] 둘째 아들이, “니는 어떻노?” 카이, “아이구 나는 그저 뭐 형님하고 동생 하는 데로 하지요. 뭐 내가 뭐 머 저 써울(고집부릴) 택이 있느냐고. 나는 이쪽도 좋고 저쪽도 좋은 사람인데. ” 이카이 [큰소리로] 기여쌋코, 아들 막내이가 말이지, 기어이, 바질튼 모애이라. 이거 빼야 된다고 기어쌋고 둥대를 들고 빼이 말이지, 거서 삐둘기가 두 마리 [청중: 그렇지!] 포올 날라. 어두로 가노 하만, 지금 의성군 금성면 산웅카는 데 영천 이씨. 그 이 대감 난데 뭐 이조 판서 난 데 거 가 가마 앉그던. 앉는데, 그래가 거 갔는데. 큰집 하고 마 막집으는 마 기진 맥진하고 몇 집 안 되고 마 철석 가나(가난)이고 큰집에는 있거든. 있어도 한 사십 집 내지 오십 집 사까(살까)? 이래 사는데. 근근 그저 요새도. 비둘기가 날라 갔부렀는데 그놈의 비둘기가 날아가 그만 산운에 앉았단 말이라. 산운 카는데가 의성군 금성면 산운 카는 데거던. 그 영천 이씨가 마이 사는데. 거 인자 날라가 앉았는데. 그 인자, 맏집이는 근근 초시 나고 마 요새 정도 면장 이런 정도만 나고, 끝집이는 마 참 자손도 많잖고 마 쇠진하고. 그래 인자 의성 산운 그기는 이왕에 그 이조 판서 났거던요. 산운에 이조 판서 나고 예조 판서 나고 행직 다 그리 났고. 중년에는 이하영씨 도지사도 거기 사람이요. 그래 인자 거기는 사람이 나는데 풍수 지리설이라 카는 기, 그 사람들인데 보만 반다시 맞는 기라. 그런데 성지는 그 뒤에 어데 왔노 하며는 전실(前室)에 난 자손들이 말이지. 전실에 논(낳은). [꾸짖듯이] “이늠아, 니 넘의 넘(다른 놈)만 테(터) 잡아주고, 잘 되도록 하머 우리는 안 잽아주노?” 아 끄집이다 들고 후다드리(후려) 팼어. 팼는데, 패이, “에이구, 형님, 잡아주지요. ” 그래 잡아 좠는데(주었는데), 고기 씨고(거기 묘를 쓰고) 내의동 홍씨 홍씨가 홍성지 인자 큰집이지. 그 집이가 똑 진사 하나 났어. 하나 나고는, 그래도 인자 강당도 지아 놓고 잘 해 놨임니더. 그런데, 이 늠 그전에는 거거 말이지 참 금산이고 좋은데 말이지. 그 미(묘) 씨고 나고는 망개띠이가 어찌 올라 오는지 일년에 그런 말이 있드구만. 일년에 벌추(벌초)를 시 분(세 번) 해야 돼, 망개 덩굴 때문에. 그런데 홍성지가 그 후에는 마 부지 거처라. 부지 거천데 결국은 보이, 큰 집에서 저거 어머이 제사 지내 줄 택도 없는 기고, 이러니 내가 사후라도 울어매(우리 어머니) 어이, 우리 어매 참 저 그거 할 때, 내가 죽고 없어도 우리 어매 평생에 제사 얻어 먹을 데, 이런 데를 택해 봐도. 그래 인자 사방 팔방으로 댕기이까 전라도 금제 평야에 가이 말이지 참 과연 그런 데가 한 군데 있그던. 자손이 없어도 그 자손이 없어도 제사 얻어 먹을 때, 이런 데가 있는데. 가마 보이, 앞에도 산이 하나 산갱이 하나 가맀는데 가마이 보이까 이것이 단두형(斷頭型)이라. 목 잘릴 형국이라 그래서 이거는 임시, 임기응변 조치로 해가 마, 그래 씨고 난 뒤에, 지금 여 전설에 그러니 요 들에 창비가 고시네 카는 기 성지 모친이 제주 고씨라. 그래 고시네 카고 하는기 그기 성지 모라. 그러면 금제 평야에서 모를 숨구기나 뭐를 하며는 그 묘 등에 와가 점심을 먹는 기라. 그러이 고시네 하고 그래 제사를 얻어 먹는다 그런 머 전설이 있지 와요? [조사자: 예.] 그래가 그 뒤에 이 분이 고향에 또 왔어. 왔는데, 그래 인제 한양 가 있다 싶어. 박한남, 그 그러면 박한남이 병자 어 임 임란 임진왜란 당시그던. [청중: 한남 고사 있지.]예 그런데 인제 그 집이서 그 카는 기는 그래 인자 성지가 거 와서, 큰집이라도 학대를 받으이 못 가고 마, 그 댕기다 아 배가 따악 고팠는기라. 고팠는데, 그래가 어느 방천에 떠억 누벘으이 걸(개울) 가에 누벘으이, 그때 칠월달 논매기 할 때라요. 그래 논매기 하는 일꾼이 넘의(남의)집 머슴 사는 총각이 박총각이라. 가마 참 무울(먹을라고 보이 웬 사람이 늘어져 눕었는데 보이 말이지 [청중: 기력을 잃었다.]그래, 진해져가 눕었는데. 그래 깨왔다. 깨워가. “그래 와 이러노?” 카이. “배가 고파 이렇다. ” 이카그던. 그래가 [큰 소리로] 자기 참 먹을라 카는 거를 그 저 성지를 대접을 했어, [본래 소리로] 해노이깐두로 결국, “내가 돈도 없고 하이 내가 잘못 했으만 기사(饑死) 해가 죽을 변 당했는데, 이 은혜를 갚는 거는, 내가 다른 거는 가주고 갚을 수도 없고 내가 그저 아는 기 그저 참 지리설을 좀 아는데. 내가 그 보답으로 내가 사(산)이나 한 자리 봐 주꾸마. ” 이카그던. 하이 고맙그던. 상주 역시 자기 어른이 죽고 이전에는 상주가 되만 총각이 머리에 실로 맨다 카더구마는, 마주무(마침) 총각이 상주라. 그래가주고 그걸 했어요. 저 참 거기 앉아가 말이지 성지가 물었어. “당대 경상 감사를 날 데 써 주까? 이 당대 경상 감사를 날 때 써 주까? 삼대 후에 정승 날 자리를 써 주까?” 가마아 생각 해 보이, 이 상주가 생각해 보이 삼대 후에 정승 날 자리를 써 주만 지는 [큰 소리로] 호강을 못하는 기라. [웃으면서] 지 뭐 땅 밑에 드가고 난 뒤에 뭐 그러이[큰 소리로] 지가 해야 좋거던 뭐라도. [본래 소리로] 그래가주고, “애 해이 그래라. 당대 경상 감사 날 데 써 주소!” 이랬어. 그래가 그 묘를 어디다 썼는고 하며는 군위군 군위면 금구동 뒷산에다 썼는기라. 썼는데, 산에도 가지 안 하고 저기 저 여기 앉아서, “저기 저 나무 하나 있지요 뭐 저기다 놓고 씨라. ” 이카그던. 그래 씨는데 좌향은 어느 쪽에 택일도 할 필요도 없고. 그래 머슴 사는, 요새 지금 옛날에는 요새는 머슴 사는 사람이 오히려 주인을 부리지마는 옛날 쯤은 머슴이 저 문서 없는 종놈이란 말이여. [청중: 옳지!] 봉건주의 때는. 그러이 밤에 저거 몇이 가가 뭐 까랫비고(파헤치고) 썼는 기라. 썼는데, 이 뒤에 그기 인자 세상에 비밀이 없지. 그 뒤에 그 우에, 삼대 정승 난다 카는 자리가 있거던. 있는데, 그런저렁 인제 이 양반은 참, 그 박군 그 양반은 박총각은 말이지, 결국 풍수지리설 저걸만 믿고 ‘애라 저 서울 가가 경상 감사 한다고’ 남의 집 사던 거 때리치우고 서울 가 있었는 기라. 서울 가 있었는데. 서울 가 있으이, 뭐 한쪽 모티(모퉁이)이 다당탕! 그리이, 낸장 마질 아이 불이나고 이렇거던. 이런데 보이, 근정전(勤政殿)에서 보이 근정전에 뭐 나오는 거 보이. 그 사람이야 근정인동 뭔동 아는기요. 아는데, 거 가가 서울 가가 시골놈이 사울 가가 일껀 뭐 일자무식이 뭐 할 끼 머가 있오. 그러니 하는 머냐 이카며는 저 주막집이 댕기미 장작이나 패주고 말이지, 마 물이나 져다 주고 이거 참 이다바 행세를 하는 기라. 이다바도 아이지 그 머 부목(심부름꾼)이라 뭐. 일을 하는데 한 분은 난리 났다 이카이까네, 서울에 막 큰 임금 있는 집에서 요새는 근정전, 임금 있는 집에서 뭐가 벌건 걸 입고 나오거던. “그래 와 이래 나오노?” 카이. “난리가 나가 절단 났다. ” 이 카거던, 저런 자 업었어. [청중: 하하!(감탄하듯이)] 업고 가이, 뒤에 머 활로 쑤고 이라는데. 누구 박한남이 귀가 없읍니다 여기. [자기 오른쪽 귀를 잡으면서] 그 당시 귀가 떨어졌어. 그런데 물았어. 업힌 사람이 또 “니는 뭐꼬?” 이래 물으이. “내가 인조 대왕이다. ” 이 카거던. 선조 대왕이그던. 그래가 남한 산성에없고 갔잖아요. 업고 가가 돌로가 요래 오가(움막)를 맨들어 놓고, 고기가 먹고 줍다(싶다) 캐가 뻐들미기(버들메기)를 잡아다가 말이지, 그래 대접을 하고, 이래 그 따문에 저 우로 가만 버들미기 안 먹슴더. 그래가 인자 환궁을 했다고, 환궁을 해가. “경상도 아무 데 있는 박한남 불러 올리라. ” 이러거던, “니가 소원이 뭐고?” 이래 됐는기라. “소원이 뭐고?” 이래 물었거던. 물으이, 경상감사를 잊았부렀어요. 잊았부리고. “한달에 한 분씩 대구서 깃대 마이 들고 가매 타고 안동을 갔다 오는 그거 씨기 주소” 이랬는 기라. [일동: 웃음] 그기 뭐냐 하만, 경상판과이라. 경상 판관인데. 요새 말하만 대구 고등 법원장 아이요. 경상판과인데 그래가 결국 인자 처음에는 경상판관을 했어. 했는데, 내중 인제 우에 감사 카는 거를 알아가 감사로 이래가주고 했어요. 했는데, 그 감사로 하이 글로 알아야. 눈하고 발바닥하고 한간데(한가진데). 글로 알아야 하지요[일동: 웃음] 그래 노이 책 쓰는 놈은 있지요. 있는데, 경상 감사에 박풍공 박한남! 아 그래 인자 또 경상 감사가 당시에 둘이 있었다 그이요. 둘이 있어가, 미나므가(명함만?) 경상 감사고 이른데. 그 인제 박한남 박풍공은 말이지, 박한남은 감사는 감사로되 실권 감사는 못했지. 왜 그러노 하만 글로 모리이요. 그러나 저 양반이 수석 감사란 말입니다. 수석 감사러 했는데 그래도 호가 박풍곤이거던. 박풍곤인데, 그 자손이 지금 어디 사느냐 하만 군위군 소보 군위군 도리 사직동 살고, 그 사직동은 와 사직동이로 하만, 그 박한남 그 사람이 거 있었거던, 그 그래고 인자 그 자손이 일부는 군위군 소보면 산북동 사는데. 그 뒤에 참 그 양반이 무식하기 때문에 도량이 조금 있었으만 후손들도 잘 될낀데. 이래서, 그 저 선조대왕이 업해(업혀서) 올라 가미 이런 이얘기했어. “우리 나라 이 중신(重臣)들 중 대신들이 따라 오나 안 오나?” 이걸 물었거던. 물으이깐들, “아무도 안 따라 오고 내 뿐입니더. ” 이래 됐는기라. 이래노이 그 물에(무렵에) 삭탈 관직된 사람이 많이 있어요. 환도(還都)해가 그래노이, 그 사람들 후진은 세대가 교체가 되며는 그 후진들은 다 글로 배왔으니 그래도 등용이 됐다. 등용이 된 사람이 있단 말이다. 있으이, 인자 서울서 베실(벼슬) 빈다고 박한남 자손은 그래도 글로 배우고 이래가 머리 좋은 사람도 영특한 사람도 있는데. 과거 빌때 마줌은(마다), “영남 군위 아무서 아무 데서 문경세재 이이 넘으로 말이지, 넘으로 베슬로 과거 볼라고 올라 오는 늠 전부 모가지 비이라(베어라)!” 이런 지령이 내렸는데. 그래가주고 그 양반 후로는 6댄가 내리 오면서 [큰 소리로] 쫄딱 곪았어. [청중: 웃음] [본래 소리로] 쫄딱 곪았는데, 그 뒤에 인제 참 박한남 9대 손인가 7대 손에서 사람이 똑똑은 거 났던 모양이라. 그래 자손이 한 삼십명이 되이까. 젊은 사람이 났는데, 우애 했노 하며는 이거를 했어. 거기 인자 칠곡 안동 장씨 장택상이 저 집에서 인자 밑에서 묘를 쓸라고 말이지 묘를 쓸라고 이라이, [큰 소리로] 박한남 자손이 국가에 충신 자손이고 이렇지 마는, 한양 과게(과거) 안 했잖아요. 충신 자손이고 이렇지 마는 인(人) 부족 세(勢)부족 이란 말 있니더. 어어[본래 소리로] 당대만 그랬지. 이래 노이 그거(그곳에) 미(묘) 씰라고 천곽을 낼라고 질(길)을 버러(벌써) 보고 갔거던. 그 사람들이 따악 해가, 버러 산까지 다 버러 매수를 해가 뭐 이래 하는데. 그래 일주일로 회의를 해도 이늠의 해결이 안 나네. 못 씨들(못 쓰도록 할) 재간이 없는기라. 말릴 도리가 없다. 그래 인자 증손이 그 때 열 다섯살 먹었어. 종손이 종손이 열 다섯 살 먹었는데, 이 종손이, “어른 분네들 뭐한다고……” 아, 열 시 살 먹었다. “어른 분네들 뭐한다고 이래 며칠로 회의를 하고 이라는 기요?” 카거던. 어떤 사람은 “종손이라도 알끼 애이다. ” 이카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하는 말이 이런 얘기를 했어. “그래도 닭이 천 마리만 봉이 한 마리 있다는데, 그래도 종손인데 우리 알루기(알리기는)는 알라야 안 되나?” 그래 종손 있는데 사실 이얘기를 했어. 하니 종손이, “그 다 회의 그만 하고, 소문 그만 내고 가 있이이소. 내가 감당하오리다. ” 그 날 저녁에 종손이 가가주고 이런 애기를 했어 자기 모친더러. “나도 인자, 나이 열 서너 살 되이……” [큰소리로] 어이, 이 전에 열 시 살 먹으만 주우(바지) 벗고 안 댕깄소? 우리 어릴 때만 해도 우리 여 저 대구 농림학교 댕길 때만 해도 여기 우리 동갑에도 여기 주우 벗고 댕긴 아들 천진데. [청중: 웃음] 그래가, “두루막을 하나 해 주소. ” 이거라, 그래 두루막을 해 입고, 그래가 장사를 인제 내일쯤 되이, 오늘쯤 두루막을 하나 해 입고 그래 인제 상문을 가는 기라. 그래가 상문을 가이, 이전에는 세력한(세력 있는) 집에는 만날 청각해 놓고 전부 여기 저 천막을 쳐 놓고 밭에 일꾼들이 과야를 하고 (밤을 세우면서 지키고) 안 합니까? 그러는데. 상주를 딱 물으며, 묻고는 하는 말이, “참 대명사임더. [큰 소리로] 대명사임더” [청중: 자꾸 대명사이라 칸다.] 기분이 좋거던. “저 밑에 저 묘는 우리 할배 묘인데, 우리는 묘를 잘못 써가요 이런데 참, 여가 참 좋은 자립니더. 이 정승 날 자립니더. ” 이카고. 이러이 상주도 좋고 지사(풍수)도 좋단 말이다. 하관 따악 할라고 행상이 고 널 여 동관 해가 올 때, “그러나 여기 씨만, 우리도 그 전 여기 씰라 카다가 와 안 썼노 카만, 여기 씨만 임금 난다 캐가 마 우리는 못 썼니더. ” 이전쯤은 그런데 씨만 역적에 몰리그던. 그래가 그 양반이 충청병사를 했어. 내주(나중에). 그래 그 자손이 지금도 거게 있는데, 지금도 이조 말엽 벼실로 그 집이 진사가 새워 (생원)이. 진사를 그전 새원이라 캤는데, 그기 변해가 성균관 진사라 캤다가 합방 조금 전에는 성균관 박사라 캤거던. 그 삼북동 카는래 가만 인제 박박사 카는 분이 내가 거기 있을 때 살아 있었는데. 그 때 한 20년전에 계산어른 나 택은 됐을거라. 그런 데 그분이 그런 얘기를 하더만. 내 그래 듣고 이애기 하는데, 성지 관계나 이런 얘기를 하는데, 성지는 이거 실지요. 본손들은 그 카만 와야 캅니다. 성지 그 홍씨. 우리 거기 있을 때 그카만 [청중: 성지 홍씨가?] 예, 그런데 그 내의동 홍씨는 말이지, 그래 살아도 스무 집만 넘으만 한 집이 무후(無後)한기라. 반다시 양어(양자)를 해야 돼. 스무 집 이상 숫자가 안 돼요. 버러 성지가 그래 썼는데. 실지이 거 저 홍가들 저거한테 그카만, 우리 거기 있을 때 댕기미(다니며) 그 사람들 대해가 이런 얘기 하만, 거짓말이다 이카지만 사실은 그래. 그러니 홍가 사람이 하나 그 내하고 친한 사람인데, 도가 (양조장)하고 이런 사람인데 친한 사람인데. 사실은 서자를 괄시를 안 하만 자손이 팽창 안 된다 그런 이애기를 한 번 하더구만.한국구비문학대계 7-2 본문 XML파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