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정보

발행호수
국민보 제三千七百一十호(No. 3710)
발행년도
1964
발행월
06
발행일
17
수록면
2
기사유형
기사

기사내용

졍갈히 다듬어진 六월의 너의 집
둘는 十九구에 너 맏이는 二三구
한 이랑  치솟는 울음 산을 향 삼킨다.
어느  이러이러 언졔가도 이러져러
어릴  잘난 이야기 없이 번져가고
져녁 놀 잔디를 덮도록 되뇌는 입술…
겨진 이름들만 말없는 성좌인가
런 돌 언져리 머린양 쓸어주면
손에 이는 얼굴 입쳐럼 피거니
(어느 날 군묘지에서)
그로부터 十四년―두 아들을 나라에 바친 한 노경의 어머니는 허구한 고난과 슬픔의 세월을 다소곳하나 줄기찬 시심으로 한 수 두 수 시를 쓰며 달어 왔다.
지난 四일―소나무 향기가 자욱한 동작동 국군묘지에는 져녁놀이 화려하게 비치고 있었다. 二十三구 장교묘역에서 다시 十九구의 육군병사 묘역으로 발을 옮기며 조용히 벌초하고 난 최형숙여사(五十七세)는 먼 눈초리 속에 추억을 더듬듯 말머리를 다.
「두 아들을 六·二五 직후의 젼에서 잃었어요. 큰 아들은 五○년 八월 대구지구 젼투에서, 둘 아들은 그보다 한 달 젼인 七월 충남 진쳔지구의 젼투에서…」
장남 문졍호 포병 중위는 그 나이 二十四세, 차남인 문졍익 상사는 二十一세의 다운 나이였다.
「지금 살고 있으면 서른여덟과 서른다섯 살의 장골일 텐데」.
나라를 지키다 간 아들들의 묘비 앞에서는 한줄기 자위의 이 향불쳐럼 피어오르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 쳐럼 쳐럼 곱던 졂음을 각하면 못 거운 덩어리로 메기만 하는 「어미의 가슴」이다. 더군다나 졍년 퇴직한 남편과 十九세와 十六세의 교육기에 있는 어린 남를 거느리는 피나는 활 속에 있어서야―
六·二五동란이 일어나자 최여사 일가는 경남 진로 피난을 다. 남편이 군 공창에서 三급군속으로 일하게 되었기 문이다.
 져무도록 바다가에서 굴을 며 산에서는 나물는 옹한 초가삼간의 피난살이에도 부푼 희망이 잇엇다. 두 아들이 그 빛에 그은 늠늠한 모습으로 활 웃으며 「언졘가는 이겨서 돌아오리라」는
―어미 디딘곳 이 산에 이어 아이들은 싸우리―
불이 팔락이는 진흙 아궁이 앞에서 최여사는 부지이로 에다 시를 쎠서 안타운 기도를 대신다. 이 시는 김소운씨의 추쳔으로 어느 잡지에 발표된 것이다.
그러나 형졔는 그 이미 젼사한 다음이었다. 그들이 젼장에서 숨을 거둔 一년 후지도 최여사는 감 같이 몰랐던 것이다. 젼사의 소식이 젼지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사령부를 통 소식을 젼받은 남편 문학선씨가 아의 상심을 염려한 나머지 혼자 괴로와하며 기회를 보다 한가 넘어간 것이다.
그날도, 바람이 싱그러운 六월의 어느 져녁녘이었다. 벼란간 골목 어귀에 들어닥친 한대의 군용 「추덕」이 있었다. 「여나 아들이…」하는 설롐으로 졎먹이를 업고 달려 나가보니 포병장교들 수무나믄명이 차에서 어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큰 아이가 돌아왔나보다…」
기으로 마구 방망이질하는 가슴으로 두리번거렸으나 큰아들 모습은 영 찾을 길 없었다.
알은도 아니하고 다음 골목으로 들어서는 장교 중의 한사람을 붙잡고 아들의 소속이랑 대며 물어보았더니 「녜? 군졍호 소위의…?」 그들은 같이 젹이 놀라며 최여사를 쳐다보더니 아들의 안부에 대서는 어지 말리를 얼버무리며 닷 후에 소식을 알아보아 드린다고 다.
목이 타는 닷가 지나 「안중위」라는 준수한 모습의 포병 장교가 찾아왔다. 대구에서 큰아들의 젼우였다는 그는 갖은 위로의 말과 함 그의 젼사를 젼주었던 것이다.
두 아이나…
그 후 六월은 열세번이나 닥쳐왔다. 로는 「례스」 기 삯으로 로는 남의 집  품삯으로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졀졀한 시졍을 엮은 시조가 이졔는 三수가 넘는다는데 대부분이 아들에 대한 것이라고 한다. 「이게 무슨 시이겠읍니. 어미의 푸념이지요」
못 겸손하는 최여사는 현 서울 마포에서 힘에 겨운 살림을 이어가고 있다.
정갈히 다듬어진 6월의 너의 집
둘째는 19구에 너 맏이는 23구
한 이랑 또 치솟는 울음 산을 향해 삼킨다.
어느 때 이러이러 언제 가도 이러저러
어릴 때 잘난 이야기 끝없이 번져가고
저녁노을 잔디를 덮도록 되뇌는 입술…
새겨진 이름들만 말 없는 성좌인가
매끄런 돌 언저리 머리인 양 쓸어주면
손끝에 이는 얼굴 꽃잎처럼 피거니
(어느 날 군 묘지에서)
그로부터 14년 ― 두 아들을 나라에 바친 한 노경의 어머니는 허구한 고난과 슬픔의 세월을 다소곳하나 줄기찬 시심으로 한 수 두 수 시를 쓰며 달래어 왔다.
지난 4일 ― 소나무 향기가 자욱한 동작동 국군묘지에는 저녁노을이 화려하게 비치고 있었다. 23구 장교묘역에서 다시 19구의 육군 병사 묘역으로 발을 옮기며 조용히 벌초하고 난 최형숙 여사(57세)는 먼 눈초리 속에 추억을 더듬듯 말머리를 꺼낸다.
「두 아들을 6·25 직후의 전쟁에서 잃었어요. 큰아들은 50년 8월 대구지구 전투에서, 둘째 아들은 그보다 한 달 전인 7월 충남 진천지구의 전투에서….」
장남 문정호 포병 중위는 그때 나이 24세, 차남인 문정익 상사는 21세의 꽃다운 나이였다.
「지금 살고 있으면 서른여덟과 서른다섯 살의 장골일 텐데.」
나라를 지키다간 아들들의 묘비 앞에서는 한 줄기 자위의 뜻이 향불처럼 피어오르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 새처럼 꽃처럼 곱던 젊음을 생각하면 못내 뜨거운 덩어리로 메기만 하는 「어미의 가슴」이다. 더군다나 정년퇴직한 남편과 19세와 16세의 교육기에 있는 어린 남매를 거느리는 피나는 생활 속에 있어서야―.
6·25동란이 일어나자 최 여사 일가는 경남 진해로 피난을 했다. 남편이 해군 공창에서 3급 군속으로 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해 저물도록 바닷가에서 굴을 따며 산에서는 나물 캐는 옹색한 초가삼간의 피난살이에도 부푼 희망이 있었다. 두 아들이 그 햇빛에 그은 늠름한 모습으로 활짝 웃으며 「언젠가는 이겨서 돌아오리라」는.
― 어미 디딘 곳
이 산맥에 이어
아이들은 싸우리 ―
불꽃이 팔락이는 진흙 아궁이 앞에서 최 여사는 부지깽이로 땅에다 시를 써서 안타까운 기도를 대신했다. 이 시는 김소운 씨의 추천으로 어느 잡지에 발표된 것이다.
그러나 형제는 그때 이미 전사한 다음이었다. 그들이 전장에서 숨을 거둔 1년 후까지도 최 여사는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 전사의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사령부를 통해 소식을 전해 받은 남편 문학선 씨가 아내의 상심을 염려한 나머지 혼자 괴로워하며 기회를 보다 한 해가 넘어간 것이다.
그날도, 바람이 싱그러운 6월의 어느 저녁녘이었다. 별안간 골목 어귀에 들이닥친 한 대의 군용 「트럭」이 있었다. 「행여나 아들이…」하는 설렘으로 젖먹이를 업고 달려 나가보니 포병장교들 스무남은 명이 차에서 뛰어내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큰아이가 돌아왔나보다…」
기쁨으로 마구 방망이질하는 가슴으로 두리번거렸으나 큰아들 모습은 영 찾을 길 없었다.
알은체도 아니하고 다음 골목으로 들어서는 장교 중의 한 사람을 붙잡고 아들의 소속이랑 대며 물어보았더니 「네? 문정호 소위의…?」 그들은 똑같이 적이 놀라며 최 여사를 쳐다보더니 아들의 안부에 대해서는 어쩐지 말꼬리를 얼버무리며 닷새 후에 소식을 알아보아 드린다고 했다.
목이 타는 닷새가 지나 「안 중위」라는 준수한 모습의 포병 장교가 찾아왔다. 대구에서 큰아들의 전우였다는 그는 갖은 위로의 말과 함께 그의 전사를 전해주었던 것이다.
두 아이나…
그 후 6월은 열세 번이나 닥쳐왔다. 때로는 「레이스」 뜨기 삯으로, 때로는 남의 집 빨래 품삯으로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절절한 시정을 엮은 시조가 이제는 3백 수가 넘는다는데 대부분이 아들에 대한 것이라고 한다. 「이게 무슨 시이겠습니까. 어미의 푸념이지요」
못내 겸손해하는 최 여사는 현재 서울 마포에서 힘에 겨운 살림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