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내용
우리 세대의 청의와 신앙으로 빚어진 동양 최대의 미륵불이 十四일 상오 六의 초롱이 졈등된 속리산 법주사 경에서 五여 승려들이 외는 독경 속에 졈안되었다. 마침 휴일에 단오졀지 겹친 이날 젼국에서 모여든 一만여명의 불신도와 선남선녀들도 모두 부쳐님 경건한 합장을 올렸다. 조계종 종졍 하동안 스님의 집젼으로 거된 불교의식에 이어 상오 十一시부터 시작된 졈안식에는 홍현표 쳬신부장관, 이창석 교통부차관과 이은씨부인 방자여사가 려왔고 신 충쳥북도 지사 등이 참석다. 높이 二十七「미터」, 벌상젼을 비롯한 몇 졈의 국보를 앞에 두고 법주사를 굽어보는 이 미륵불은 一九三九년, 그러니 지금부터 二十五년젼 젼북 인에 살았던 김영곤씨가 가를 턴 돈으로 당대 쳣손을 던 불교조각가 김복진씨에 의 착공―필의 졍력을 기울여 고 다듬다. 四一년 돌연 작고하자 한 일인이 손을 댔으나 완성을 보지 못한 방을 맞았다. 신도들은 부쳐님의 불력이라 기들다. 김영곤씨는 다시 조각가 윤효중씨에 의뢰―완성을 서두르다가 六·二五직젼 七十七세의 나이로 별세다. 이부터 법주사로 부임오는 주지들은 미완으로 옷 벗은 미륵불을 대할 마다 황송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一九五九년 이대의 주지 이 거창한 불사는 다시 시작되었다. 발틀을 고 젼국에 모금운동을 벌이다 주지가 바었다. 현 주지 추담스님이 부임되고도 한 불사는 계속되지 못었다. 돈이 없기 문이었다. 이 사실이 한국일보 六十二년 十一월 二十一일자에 알려지자 각계의 모금운동은 활발졌다. 당시 최고회의 의장이었던 「박」대통령이 一만원 충북도에서 二十만원 그리고 신도들의 성금이 쏜아져 들어왔다. 작년 三월 十五일 임쳔, 신상균 두 분에 의 마지막 손질의 기공식이 올려지고 공사는 「피치」를 올렸다. 총 공비는 一八十만원 신라 진흥왕 十四년(서기 五五三년) 의신 조사가 창건한 법주사는 혜공왕 二년 「진표율사」가 동쳘의 미륵 입상을 조성함으로쎠 젼국 유수의 대사찰로 젼던 것인데 고려 목종 옆에 세운 쳘과 함 대원군의 경복궁 증건졍의 희으로 당젼이란 돈의 자료로 쓰여지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젼지고 있다. 불교의 나라 인도의 수많은 불상 가운데서도 크기로 이름난 「바미얀」불상 녯도 모두 좌상이기 문에 불과 二十「미터」도 못되고 중국의 운암 석굴 十六동에 있는 불상도 역시 좌상으로 높이 十八「미터」. 일본 「가마라」 대불도 법주사 미륵불입상보다는 작다는 이야기다. 경주 석굴암의 본존불 높이는 二.七三「미터」 라서 이 미륵불은 석굴암 불상보다 약 十나 높은 셈이다. ◆졈안식이란◆ 졈안이란 불교 미술에서 흔희 쓰이는 말 불상을 그릴 사귀가 범하지 못하도록 마지막에 주문을 외우며 눈에 졈을 는 것 라서 불상도 이 졈안식을 올려야만 그부터 거룩한 신격이 부여되는 것이다.
우리 세대의 청의와 신앙으로 빚어진 동양 최대의 미륵불이 14일 상오 6백 개의 초롱이 점등된 속리산 법주사 경내에서 5백여 승려들이 외는 독경 속에 점안되었다. 마침 휴일에 단오절까지 겹친 이날 전국에서 모여든 1만여 명의 불신도와 선남선녀들도 모두 새 부처님께 경건한 합장을 올렸다. 조계종 종정 하동안 스님의 집전으로 거행된 불교 의식에 이어 상오 11시부터 시작된 점안식에는 홍현표 체신부 장관, 이창석 교통부 차관과 이은 씨 부인 방자 여사가 내려왔고 신 충청북도 지사 등이 참석했다. 높이 27「미터」, 불상전을 비롯한 몇 점의 국보를 앞에 두고 법주사를 굽어보는 이 미륵불은 1939년, 그러니까 지금부터 25년 전 전북 태인에 살았던 김영곤 씨가 가재를 턴 돈으로 당대 첫손을 꼽던 불교 조각가 김복진 씨에 의해 착공 ― 필생의 정력을 기울여 깎고 다듬다, 41년 돌연 작고하자 한때 일인이 손을 댔으나 완성을 보지 못한 채 해방을 맞았다. 신도들은 새 부처님의 불력이라 기뻐들 했다. 김영곤 씨는 다시 조각가 윤효중 씨에 의뢰― 완성을 서두르다가 6·25 직전 77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이때부터 법주사로 부임해오는 주지들은 미완으로 옷 벗은 미륵불을 대할 때마다 황송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1959년 이대의 주지 때 이 거창한 불사는 다시 시작되었다. 발틀을 매고 전국에 모금 운동을 벌이다 주지가 바뀌었다. 현 주지 추담 스님이 부임되고도 한때 불사는 계속되지 못했었다. 돈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 사실이 한국일보 62년 11월 21일 자에 알려지자 각계의 모금 운동은 활발해졌다. 당시 최고회의 의장이었던 「박」 대통령이 1백만 원 충북도에서 2만 원 그리고 신도들의 성금이 쏟아져 들어왔다. 작년 3월 15일 임천, 신상균 두 분에 의해 마지막 손질의 기공식이 올려지고 공사는 「피치」를 올렸다. 총공비는 180만 원. 신라 진흥왕 14년(서기 553년) 의신 조사가 창건한 법주사는 혜공왕 2년 「진표율사」가 동철의 미륵입상을 조성함으로써 전국 유수의 대사찰로 전했던 것인데 고려 목종 때 옆에 세운 철책과 함께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정책의 희생으로 당백전이란 돈의 자료로 쓰여지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불교의 나라 인도의 수많은 불상 가운데서도 크기로 이름난 「바미얀」불상 넷도 모두 좌상이기 때문에 불과 20「미터」도 못되고 중국의 운암 석굴 16동에 있는 불상도 역시 좌상으로 높이 18「미터」. 일본 「가마쿠라」 대불도 법주사 미륵불입상보다는 작다는 이야기다. 경주 석굴암의 본존불 높이는 2.73「미터」 따라서 이 미륵불은 석굴암 불상보다 약 10배나 높은 셈이다. ◆점안식이란◆ 점안이란 불교 미술에서 흔히 쓰이는 말 불상을 그릴 때 사귀가 범하지 못하도록 마지막에 주문을 외우며 눈에 점을 찍는 것 따라서 불상도 이 점안식을 올려야만 그때부터 거룩한 신격이 부여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