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내용
「국립박물관」의 젼 학예관이었던 임쳔(五十八세)씨는 작업복의 평을 마쳤다. 지난달 二十八일 밤 위암으로 붐지기지 「녝타이」 한번 의졋이 고 다닐 날이 없었고 그럴 만큼 활이 넉넉지도 못다. 자기가 원더라면 언졔나 집 한간 마련할 기회가 있는 사계의 권위였으나 고젹의 일부인 듯 럽지 않은 그의 인품이 그런 세상사를 아랑곳 안던 것이다. 한국의 고찰치고 그의 손길이 가지 않은 졀이 없다. 「화엄사」의 각황젼 「수덕사」의 대웅젼 「장안사」의 사성젼 「성불사」의 극락젼 성쳔의 동명관 등의 복원은 방 젼에 고 근에 와서는 남대문 증수 석굴암 젼실 설계도 다. 특히 강진의 무위사 극락젼은 완젼히 쳬다가 복원하는 것은 그가 아니면 못하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고건축의 구조, 양식, 복원설계 아니라 고분발굴에도 한국 사람으로 가장 많이 참가한 경험자이며 고분 벽화나 조각품의 실측도 졔작에서도 놀라운 업젹을 남긴 인간 문화였다. 그의 져서 「한국고건축 술어집」은 복잡한 부분에 이르기지의 도판 설명과 젼국 고건축 실측도지 집대성하여 귀중한 고고학젹 문헌으로 남아 있다. 아니라 성 법당방 공주 송산리 졔고분벽화와 수덕사 무위사 등 사벽화의 모사는 원화와 분간할 수 없을 졍도로 졍묘한 필치여서 그중 十여졈이 국립박물관에 보존되고 있다. 그의 많은 실측도가 삽입된 「감은사」는 六一년도 「한국」출판문화상을 받은 젹도 있다. 그의 작고로 한국의 복원관계 작업은 당분간 큰 시련을 겪을 것이라고 국립박물관 미술과장 최순우씨는 말한다. 그는 많은 졔자를 양성으나 그쳐럼 종합젹인 경험과 안식을 가진 후계자가 없기 문이라는 것이다. 성서 어난 고인은 어릴 일본서 회화공부를 하다가 한국 옛 문화의 보존 발굴 복원에 을 두고 二○년간을 고미술과 함 살았는데 그중 二○년간은 국립박물관 직원으로 있었다. 그의 유일한 자작벽화는 「반도호톌」 지하실「바」에서 볼 수 있다. 길이 三○쳑인 이 벽화는 이조 의 왕국 후원인데 일품이라고들 한다. 숨을 거두기지 그는 못다 한 「단쳥 문양집」의 발간을 아쉬워다. 고려조 후의 각종 건축문양을 거의 그려두었으나 출판 못하고 중환에 이르렀던 것이다. 지난 三○일 자기 유언대로 모친 옆에 묻힌 그는 유족에 부인과 一남 四녀가 있다.
「국립박물관」의 전 학예관이었던 임천(58세) 씨는 작업복의 평생을 마쳤다. 지난달 28일 밤 위암으로 숨지기까지 「넥타이」 한 번 의젓이 매고 다닐 날이 없었고 그럴 만큼 생활이 넉넉지도 못했다. 자기가 원했더라면 언제나 집 한 칸쯤 마련할 기회가 있는 사계의 권위였으나 고적의 일부인 듯 매끄럽지 않은 그의 인품이 그런 세상사를 아랑곳 안 했던 것이다. 한국의 고찰치고 그의 손길이 가지 않은 절이 없다. 「화엄사」의 각황전, 「수덕사」의 대웅전, 「장안사」의 사성전, 「성불사」의 극락전, 성천의 동명관 등의 복원은 해방 전에 했고 근래에 와서는 남대문 증수, 석굴암 전실 설계도 했다. 특히 강진의 무위사 극락전은 완전히 해체했다가 복원하는 것은 그가 아니면 못하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고건축의 구조, 양식, 복원설계뿐 아니라 고분 발굴에도 한국 사람으로 가장 많이 참가한 경험자이며 고분 벽화나 조각품의 실측도 제작에서도 놀라운 업적을 남긴 인간문화재였다. 그의 저서 「한국 고건축 술어집」은 복잡한 부분에 이르기까지의 도판 설명과 전국 고건축 실측도까지 집대성하여 귀중한 고고학적 문헌으로 남아 있다. 뿐만이 아니라 개성 법당방, 공주 송산리 백제 고분 벽화와 수덕사, 무위사 등 사벽화의 모사는 원화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정묘한 필치여서 그중 10여 점이 국립박물관에 보존되고 있다. 그의 많은 실측도가 삽입된 「감은사」는 61년도 「한국」출판문화상을 받은 적도 있다. 그의 작고로 한국의 복원 관계 작업은 당분간 큰 시련을 겪을 것이라고 국립박물관 미술과장 최순우 씨는 말한다. 그는 많은 제자를 양성했으나 그처럼 종합적인 경험과 안식을 가진 후계자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개성서 태어난 고인은 어릴 때 일본서 회화 공부를 하다가 한국 옛 문화재의 보존 발굴 복원에 뜻을 두고 20년간을 고미술과 함께 살았는데 그중 20년간은 국립박물관 직원으로 있었다. 그의 유일한 자작 벽화는 「반도 호텔」 지하실「바」에서 볼 수 있다. 길이 30척인 이 벽화는 조선 때의 왕국 후원인데 일품이라고들 한다. 숨을 거두기까지 그는 못다 한 「단청 문양집」의 발간을 아쉬워했다. 고려조 후의 각종 건축 문양을 거의 그려두었으나 출판하지 못하고 중환에 이르렀던 것이다. 지난 30일 자기 유언대로 모친 옆에 묻힌 그는 유족에 부인과 1남 4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