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작성자 이장희
- 분류 사전ㆍ공구 기타
강홍립 강홍립 姜弘立 이장희 조명연합군|광해군 중립외교 인물 조선시대 한성부우윤, 순검사, 오도원수 등을 역임한이해 진주사(陳奏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1608년(광해군 즉위년) 보덕(輔德)이 되고, 이듬해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을 거쳐 1614년 순검사(巡檢使)를 역임한이때 강홍립은 “조선군의 출병이 부득이 이루어졌다.”고 밝히고 남은 군사를 이끌고 후금군에 투항했다.이는 출정 전 ‘형세를 보아 향배를 정하라’고 한 광해군의 밀명에 의한 것이었다.『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인조실록(仁祖實錄)』『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국조방목(國朝榜目)』
-
- 상위자료 분야: 왕족 / 유형: 인물
- 작성자 김가람
- 분류 사전ㆍ공구 사전
세자 시절 광해군은 자신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정명공주와 영창대군을 예뻐하였고 그들도 광해군을 잘 따랐었는데, 왕위에 오른 이후 광해군의 태도가 바뀐 것이다.비록 영창대군이 형님이 보고 싶다고 울 정도로 광해군을 따르고 나이가 어리기는 하였어도, 나이가 들면 들수록 광해군의 위협 세력으로 부상할 가능성이 매우 컸다.결국 1613년(광해군 5) 광해군 측은 영창대군 및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하여 <계축옥사>를 일으켰다.[공주로의 복권] 1623년(광해군 15) 3월 광해군을 축출하고, 인조가 왕위에 오르는 <인조반정>이 일어났다.)를 한 광해군의 실정(失政)들을 바로잡는 것이었다.
-
- 작성자 장정수(고려대학교)
- 분류 연구성과 기타
광해군대의 출병 논쟁은 주로 명분-실리의 이분법적 구도로 다루어져 왔다.출병에 미온적인 자세를 보인 광해군은 실리에 입각한 중립외교를 시도했으나, 명분론의 강한 압력에 한 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이었다.이 글에서는 ‘광해군의 중립외교’가 아니라 ‘조선의 이중외교’에서 본 논쟁이 유발되었다고 보았다.
-
- 작성자 오항녕(전주대학교)
- 분류 연구성과 기타
조금씩 사료에 근거하여 역사 현실에 가까운 논문이 제출되고는 있지만 여전히 광해군 중립외교론의 위세는 강하고 그에 따라 두 차례의 호란을 겪은 인조대에 대한 평가는 박하다.근대주의적 역사관에 의해 계해반정이 부정적으로 인식된 결과가 실은 광해군 재평가, 광해군의 부활이었다.일제 식민사관론자들이 조선후기를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식민지 합병을 합리화하기 위해 광해군을 띄운 것은 우연이 아니라 정확한 논리적 장치였다.광해군대가 살기 힘들어 반정을 일으켰던 사람들에게는조선 사회와 인민들은 광해군 15년 동안의 시간을 ‘잃어 버렸다.’이들은 광해군이 남겨준 나라의 상황을 임진왜란의 충격과 마찬가지 비상사태로 인식했다.그러나 그 과정에서 광해군대 잔여세력의 크고 작은 반란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