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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위자료 유방집(遺芳集)
- 작성자 조소앙(趙素昻)
- 분류 고전자료 고전국역서
이봉창전〔李奉昌〕이정원조소앙(趙素昻)이봉창(李奉昌)국기 앞에서 죽음을 결심하며 적국 왕을 죽이겠다고 맹세함 공의 이름은 봉창(奉昌, 1901~1932)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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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위자료 일성록(日省錄)
- 분류 고전자료 고도서
죄인 손효충(孫效忠) 등을 정배(定配)하고 이봉창(李鳳昌) 등을 풀어 주라고 명하였다.…김규선2[ 죄인 손효충(孫效忠) 등을 정배(定配)하고 이봉창(李鳳昌) 등을 풀어 주라고 명하였다. ] ○ 하교하기를, “국청에 갇혀 있는 죄인 가운데 죄인 손효충은 이번 일 이외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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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위자료 동아일보 1960년01월
- 작성자 동아일보사
- 분류 근현대자료 연속간행물
1960년 李奉昌義士擧事 29周年 이봉창(李奉昌) 1960. 01. 09 2016. 05. 08. 01월 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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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위자료 동아일보 1960년01월
- 작성자 동아일보사
- 분류 근현대자료 연속간행물
1960년 의거 29주년 이봉창의사의 [肖] 이봉창(李奉昌) 1960. 01. 10 2016. 05. 08.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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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위자료 제87주년 이봉창 의사 의거 기념식
- 작성자 대한민국역사박물관
- 분류 멀티미디어자료 이미지
정치행정_독립운동제87주년 이봉창 의사 의거 기념식이봉창 의거 기념식 사회자http://archive.much.go.kr/data/03/folderView.do?jobdirSeq=1245&idnbr=20190122112019이봉창의거_0024.jpg대한민국역사박물관2010년대일제강점기(1910~1945)제87주년 이봉창 의사 의거 기념식 사회를맡은 이성우 이봉창의사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의 모습이다.이봉창,독립운동,한인애국단,이봉창의사기념사업회이미지원본대한민국역사박물관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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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위자료 제87주년 이봉창 의사 의거 기념식
- 작성자 대한민국역사박물관
- 분류 멀티미디어자료 이미지
정치행정_독립운동제87주년 이봉창 의사 의거 기념식이봉창 의거 기념식 연단http://archive.much.go.kr/data/03/folderView.do?jobdirSeq=1245&idnbr=20190122122019이봉창의거_0025.jpg대한민국역사박물관2010년대일제강점기(1910~1945)제87주년 이봉창 의사 의거 기념식 연단모습이다.이봉창,독립운동,한인애국단이미지원본대한민국역사박물관4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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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위자료 해외항일운동연표
- 작성자 국사편찬위원회
- 분류 사전ㆍ공구 연표
ch_013_1932_01_08한인애국단원 이봉창(李奉昌)이 동경의 경시청 앞에서 천황고숙화, <대한민국임시정부 연표>,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80주년기념논문집(하)≫, 국가보훈처,1999, 744쪽관내1932. 01. 08한인애국단원 이봉창(李奉昌)이 동경의 경시청 앞에서 천황 행렬에 폭탄투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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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위자료 해외항일운동연표
- 작성자 국사편찬위원회
- 분류 사전ㆍ공구 연표
ch_013_1932_09_16이봉창(李奉昌)이 일본 대심원 형사법정에서 비공개 재판을고숙화, <대한민국임시정부 연표>,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80주년기념논문집(하)≫, 국가보훈처,1999, 744쪽관내1932. 09. 16이봉창(李奉昌)이 일본 대심원 형사법정에서 비공개 재판을 받음(9월 30일 사형 언도, 10월 10일 시곡(市谷)형무소에서 사형 집행)고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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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류 연구성과 조사보고서
이봉창의사 투탄 의거지2text/xml,image/jpeg1900-01-01 00:00:00.0001900-01-01 00:00:00.0002013-10-21 00:00:00.000"李奉昌의거는 1932년 1월 8일 히로히토를 향해 경시청 앞에서 폭탄을 던진 사건으로, 히로히토를 폭사시키는 데는 실패하였지만, 宮內大臣이 탄 마차 옆에서 폭발하여 세계를 놀라게이봉창은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같은 해 9월 30일 도쿄 대심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1932년 10월 10일 오전 9시 2분 이치가야(市ケ谷)形務所에서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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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황선익(국민대학교)
- 분류 연구성과 기타
-3199Article1932년 이봉창 의거는 일본 제국주의의 폭주에 경종을 울린 일대 사건이다.그러나 상하이 교민사회와 미주 한인 사회의 계속된 지원은 임시정부의 의열 투쟁에 활기를 불러일으켰고, 결국이봉창 의거라는 성과로 이어졌다.그런 가운데 일어난 이봉창 의거는독립운동에 대한 미주 한인의 갈증을 풀어주었다.미주에까지 추모 분위기가 번져갔다.두 달 후 윤봉길 의사가 순국한 후, 이봉창 의사의 추도회는 대체로 이·윤 두 의사에 대한 공동추도회로 개최되었다.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죽음은 역설적으로 미주 동포들을 한데 모으고, 임시정부에 대한 지지를 다지는 큰 전환점이 되었다. 1930년대 의열 투쟁의 서막을 연 이봉창 의거는 해외 한인사회와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