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자료 승정원일기 정조 15년
    분류 고전자료 고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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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위자료 홍재전서(弘齋全書)
    작성자 정조(正祖)
    분류 고전자료 고전국역서

    도봉서원(道峯書院) 치제문김홍영정조(正祖)이해 임자년(1792, 정조16) 중양절 다음 날 아침에 광릉(光陵 세조(世祖)의 능)을 참배하기 위하여 갈 때 길이 선정신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와 송시열(宋時烈)...홍재전서(弘齋全書)2006.11.30

  • 상위자료 홍재전서(弘齋全書)
    작성자 정조(正祖)
    분류 고전자료 고전국역서

    선정신(先正臣)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 치제문(致祭文)김홍영정조(正祖)더디고 더디도다 나의 행차여 / 遲遲吾行 화성에서 이틀을 묵으니 / 信宿華城 화성의 북쪽에 / 于華之北 몇 칸의 집이 있네 / 有屋數楹 누구의 집이냐면 / 云誰之屋 문정공의 ...홍재전서(弘齋全書)2006.11.30

  • 상위자료 사료 고종시대사6
    분류 근현대자료 도서(사료)

    至於願納事, 令政院發關箕營, 十分詳査以聞. 爾則疏中幾許句語, 不無挾雜之計, 施以譴罷之典.ㆍ『승정원일기』 고종 9년 5월 30일

  • 상위자료 한국사료총서 제33집 [東史約 上]
    작성자 이원익(李源益)
    분류 근현대자료 도서(사료)

    , 時臺諫請革屢月不允, 弘文館亦逐日論啓, 一日副提學趙光祖至四啓, 上, 日此事予豈不料, 只以其來已久而難之耳, 明日議大臣罷之, 光祖謂承旨, 曰不蒙此允, 今日不可退家, 日暮臺諫皆退, 玉堂仍留不出, 至鷄鳴不止, 上不得已允之, 承旨等倚案熟睡, 皆懷厭苦, 大內嚴密之地, 中使徹夜出入煩啓不已,

  • 상위자료 한국사료총서 제33집 [東史約 上]
    작성자 이원익(李源益)
    분류 근현대자료 도서(사료)

    , 而朴英鄭鵬世無識者何歟, 曄, 曰不特朴英鄭鵬也, 閔箕學行俱備人無知者, 浚慶, 曰子欲比閔箕於朴英鄭鵬乎, 曄, 曰閔公居鄕相之位, 人不推仰若以彼學行居于淸凉山智異山, 則一代尊敬豈止此而已乎, 浚慶不以爲然, 朴世采, 曰閔箕淸修好善殆近世名相也, 石潭野史論貶, 太過至於引婢妾事以譏之, 此殆當時諸賢所不免, 何可以是律之, 世傳閔公家與白仁傑家對門二婦人相失聞見詿誤其或然歟,

  • 작성자 최인선
    분류 사전ㆍ공구 기타

    비각(碑閣)은 정면 1칸, 측면 1칸 맞배지붕으로 창방과 평방을 두르고 우물천장을 하였으며 방풍판을 부착하였다.이 비각은 1984년에 보수하고 그 후 1986년 정면 5칸, 측면 2칸의 강당과 정면 3칸, 측면 1칸의 영정각(影幀閣)을 새로이 건립하여 영정을 봉안하였으며, 귀양살이 당시의 초가도 복원하였다.『문화재도록: 도지정문화재편』(전라남도, 1992)

  • 작성자 유승주
    분류 사전ㆍ공구 기타

    시호는 영정헌문의무장숙흠효대왕(榮靖獻文懿武章肅欽孝大王)이다. 묘호(廟號)는 인종이다. 능호는 효릉(孝陵)으로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 있다.『중종실록(中宗實錄)』『인종실록(仁宗實錄)』『선원계보(璿源系譜)』

  • 작성자 박연두
    분류 사전ㆍ공구 기타

    [내용]1578년(선조 11)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주자(朱子)의 영정을 모시기 위하여 은병정사(隱屛精舍)를 창건하였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4년 관찰사 정사호(鄭賜湖)와 목사 김상준(金尙雋)이 복원하였다.1610년(광해군 2)에 ‘소현’이라는 사액을 받았으며, 그 뒤 조광조(趙光祖)·이황(李滉)·이이(李珥)·성혼(成渾)·김장생(金長生)·송시열(宋時烈)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 작성자 김문준(건양대학교)
    분류 연구성과 기타

    조광조의 지치주의 이후 조선시대 公論은 누구나 동의하는 보편적인 논의를 지칭하지만 사림이 분열한 이후에는 당파적 이해를 반영하는 黨論과 구분하기 어려워지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송시열을 추숭한 노론 계열의 학자들은 尊朱子 攘夷狄을 기치로 삼고 왕이나 권세가들의 권력 남용을 제어하고 강력한 정치적 통일을 이루어 道義 사회를 구현하려고 했다. 그러나 점차 17세기에 수립한 당시의 정치적 동기와 목표는 상실하고 결국 탕평에 반대한 노론 벽파가 正祖 사후에 勢道政權을 만들어 내면서 정국을 장악하고 권세를 전횡하는 폐해로 귀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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